멀쩡한 윗옷, 화염속 거짓말 밝혀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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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녀 숨지게한 방화 사건, 화재 재현 과학수사로 진실 규명

방화범 김모 씨가 불을 지른 전남 여수의 단독주택 2층 현장 구조도. 김 씨는 동거녀 모녀가 있는 작은방 문 앞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반대편 안방을 통해 테라스로 빠져나왔다(왼쪽). 김 씨가 불을 지른 2층짜리 단독주택 실제 전경(오른쪽 위). 김 씨 주장대로 불길을 뚫고 동거녀 모녀를 구조하려다 화상을 입었다면 옷이 탔어야 하지만 사고 직후 이송 당시 김 씨의 옷은 전혀 타지 않았다(오른쪽 아래). 대검찰청 제공
2011년 9월 전남 여수의 한 시골 마을에 있는 단독주택 2층에서 치솟은 불길은 2층 방에 고립된 최모 씨(당시 44세)와 박모 양(당시 15세) 모녀를 집어삼켰다. 누군가가 2층 복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방화였다. 하지만 용의자로 지목된 최 씨의 동거남 김모 씨(47)를 놓고 목격자인 김 씨의 노모와 딸의 진술이 정반대로 엇갈리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최 씨의 방화 자살 가능성도 제기됐다. 법원도 1심은 징역 20년을 선고했지만 2심에선 무죄를 선고했다.

○ 미궁에 빠진 방화 살인 미스터리


김 씨는 2011년 자신이 살던 집에 불을 질러 동거녀 모녀를 죽인 혐의(현주건조물방화치사)로 구속 기소됐다. 집에는 김 씨와 그의 어머니, 아들, 딸, 동거녀 최 씨와 최 씨의 딸 등 6명이 함께 살았다. 화재 당시 2층에는 최 씨와 최 씨의 딸이 있었다. 경찰은 2억 원에 가까운 주택 신축 비용 분담 문제를 두고 최 씨와 갈등을 빚은 김 씨가 불을 질러 살해한 것으로 보고 체포했다. 하지만 김 씨는 과거 방화 전력이 있는 최 씨가 신병을 비관해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반박했다.

목격자인 김 씨의 80대 노모와 10대 딸의 진술이 극명히 엇갈렸다. 1층 거실에서 TV를 보던 초등학교 6학년생 딸은 아버지 김 씨가 2층으로 올라간 지 10분 뒤에 2층 계단에서 풍선 모양의 불길이 치솟는 걸 봤고, 집 밖 마당으로 나와 보니 김 씨가 2층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했다. 반면 마당에 있던 김 씨의 노모는 “아들(김 씨)이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펑’ 소리와 함께 2층에서 불길이 치솟자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2층에서 구조 활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한 것이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1심을 맡은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김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사고 당시 김 씨 양말과 반바지에서 휘발유가 검출됐고, 동거녀 최 씨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2심을 맡은 광주고법은 노모의 손을 들어주며 무죄를 선고했다. 불길이 급속하게 번지려면 휘발유를 뿌리고 시간이 제법 지나 유증기가 가득 찬 상태에서 불을 붙였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펑’ 소리가 크게 났을 가능성이 있어 이 소리를 들었다는 노모의 진술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 과학 실험이 밝힌 범인의 거짓말

2013년 5월 무죄 선고 직후 풀려났던 김 씨는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내면서 19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법정 구속됐다. 광주고검이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제출한 대검찰청 과학 실험 분석 결과가 김 씨의 주장을 깨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대검 과학수사1과 화재수사팀 강정기 수사관(43)은 여수 화재 현장과 똑같은 조건을 갖추고 휘발유를 부은 불길에 사람 형태의 더미(인체 모형)를 통과시키면서 온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사건 당시 김 씨가 마당에 있다가 불길을 보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는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휘발유에 불이 붙고 15초 후에 2m(2층 복도 길이)를 3초 동안 통과시키자 더미에 붙은 온도계가 350∼900도까지 치솟았다. 입혀 둔 옷은 새까맣게 불탔다. 김 씨가 불타는 복도를 지나갔다면 그가 입고 있던 옷이 멀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살아 있을 수조차도 없다는 증거였다.

김 씨는 당시 양손과 안면, 양발목과 무릎에 2도 화상을 입었지만 상의는 멀쩡했다. 대검이 똑같은 환경을 설정해 이번에는 불을 붙이자마자 곧바로 더미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실험해 보니 옷은 거의 타지 않았다. 사람이 휘발유를 바닥에 뿌리는 장면을 적외선 열화상 카메라로 찍어 보니 손과 양말에 휘발유가 뚜렷하게 묻었다. 김 씨가 사건 당시 불을 붙이고 바로 빠져나왔을 때와 거의 유사한 결과였다.

다시 재판을 맡은 광주고법은 강 수사관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여 지난달 14일 김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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