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짙게 바르고… 女작가들, 사랑을 찍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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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9년전 시작한 이벤트… 女작가 입술도장 30여개 공개
2020년 창립 20주년때까지 모아 비매품으로 독자에 선물할 계획

초로(初老)의 수녀가 태어나 립스틱을 처음 바른 날이 있었다. 일탈이고 사건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동백꽃 닮은 분홍색 입술 도장을 찍고선 사랑의 정의에 대해 썼다. ‘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9년 전인 2006년 12월 1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출판사 마음산책 사무실. 정은숙 대표는 사무실을 찾은 이해인 수녀에게 자신의 립스틱을 건넸다. 당시 정 대표는 마음산책에서 ‘기쁨이 열리는 창’, ‘사랑은 외로운 투쟁’을 출간한 수녀의 육필 원고, 편지 등을 모으고 있었다. 대화 중에 수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술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래, 입술 도장을 받아보자.”

“평생 한 번도 발라본 적 없는데….”

수녀는 거절하고 잠시 망설이더니 입술에 립스틱을 엷게 발랐다. 화장이라기보다 소녀가 색연필로 색칠놀이하는 듯했다. 엽서 크기의 켄트지 위에 입술을 찍고선 ‘삶은 끝도 없는 보물찾기입니다’라고 썼다. 정 대표는 “재미없게 삶이 뭐예요. 사랑에 대해 써주셔요”라고 했다. 수녀는 다시 입술 도장을 찍었다. 사랑을 물어서일까, 분홍빛이 더 선명해졌다.

마음산책이 8일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했거나 출간 예정인 여성 작가의 입술 사진을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모두 30여 명으로 고 박완서 작가를 비롯해 천양희, 강석경, 황인숙, 나희덕, 정이현 등이다. 서양화가 고 김점선 작가도 포함됐다.

작고한 박완서 작가는 2008년 2월 당시 77세 나이로 입술 도장을 찍었다. 나이에 비해 입술 자국도, 메시지도 도발적이다. 박 작가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여배우처럼 과감하게 찍었다. 그러고선 입술 아래 ‘당신께 드릴 것은 오직 이뿐’이라고 썼다. 지켜보던 정 대표와 직원들은 “야해요”라며 열광했다. 박 작가는 “너무 심한가. 독자들은 문학적으로 이해해 줄 거야”라며 웃었다.

김점선 작가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적어 달라고 청하자 “너네 미쳤느냐. 사랑에 정의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힘찬 글씨로 썼다. ‘사랑을 정의 내릴려고 덤비는 자들은 지금 당장 죽어!’ 그다웠다.

나희덕 시인 입술엔 물집 잡힌 자국이 선명하다. 지난해 12월 세월호 참사 기억 달력 ‘기억하라. 그리고 살아라’ 제작에 참가한 직후였다. “올해는 너무 아픈 해”라던 시인은 ‘부르튼 입술로 사랑을 말하다’라고 남겼다.

입술 도장을 찍은 여성 작가들은 처음엔 쑥스러워서 거절하다가 일단 시작하면 아이처럼 즐거워하면서 원하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찍었다. 그러면서 다른 작가의 입술 모양, 색깔, 글귀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천양희 시인은 딱 한 번만 입술을 찍었다. 갈색 립스틱을 바른 그의 입술은 작심하고 그린 것처럼 산을 닮았다. 천 시인은 캘리그래피 같은 글씨로 ‘사랑은 산이다’라고 아래에 썼다.

정 대표는 “2020년 마음산책 설립 20주년이 되는 날 비매품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라며 “독자들은 작가가 펜 같은 도구를 빌리지 않고 입술로 남긴 흔적을 통해 독특하고 진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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