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2분 늦게 받았다고… 사과편지 6개월 쓰게 한 ‘虎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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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사 직원 울리는 블랙컨슈머

“하늘 같은 고객을 2분이나 기다리게 한 거야? 당신들이 고객 무시하고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봐. 금감원이고 청와대고 민원 넣어서 아주 망하게 할 테니까!”

생명보험사의 콜센터 상담원 A 씨는 자주 악몽을 꾼다. 스트레스로 우울증까지 생겨 심리치료도 받고 있다. A 씨의 악몽은 지난해 걸려온 이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상담사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된 것을 참지 못한 민원인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A 씨가 여러 차례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민원인은 “화가 풀릴 때까지 매주 한 번 사과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A 씨는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매주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후로도 몇 차례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거나 소리를 지르는 민원인과 통화할 때마다 A 씨는 가슴이 떨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

금융회사들이 ‘블랙 컨슈머’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금융회사 직원들은 일부 고객들의 상식에 벗어나는 요구와 막말,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금융감독원의 민원발생평가와 기업 이미지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악성 민원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선량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블랙 컨슈머를 골라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도 넘은 블랙 컨슈머 백태


금융회사 중에서도 보험사는 민원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10년 이상 장기 상품을 판매하는 데다 보험금 청구 등 고객과의 접점도 많기 때문이다. 한 손해보험사 고객은 법원에서 보험금 지급 사유가 안 된다는 판결이 났는데도, 보험사를 찾아가 자신의 허벅지를 단도로 찌르며 자해하기도 했다. 중도 해지한 보험의 만기 환급금 전액을 지급하라며 자살 소동을 벌이거나 유가족들이 사망보험금을 내놓으라며 시신이 담긴 관을 보험회사 로비로 가져와 시위를 벌인 경우도 있다. 카드업계에서는 술값이 너무 많이 나왔다며 결제를 취소해 달라는 요구가 단골 악성 민원이다.  
▼ 금융사 무원칙 대응이 ‘악성민원 악순환’ 불러 ▼

금융권 블랙컨슈머 공포


은행은 점포를 찾아와 괴롭히는 악성 민원인이 문제다. 한 은행 창구 직원은 고객이 홧김에 집어던진 수납 접시에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고 성형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고객으로부터 사과는커녕 병원비도 받지 못해 치료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했다.

○ 블랙 컨슈머 키우는 민원평가제도


금융회사들은 이런 블랙 컨슈머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 한 카드사 직원은 “악성 민원인이 돈이나 사은품 등을 요구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사비로 상품권 등을 챙겨주고 민원을 무마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금융회사들이 악성 민원인에게 무릎을 꿇는 가장 큰 이유는 금감원의 민원발생평가 때문이다. 올해 1월 금융경제연구소가 은행 콜센터와 영업창구, 민원 전담 부서 근무자 37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6%가 금감원 등 감독기관에 민원을 제기해 경영평가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악성 민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금융회사의 무원칙한 태도가 블랙 컨슈머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관된 대응 기준 없이 부당한 요구도 받아주는 태도가 소비자들의 보상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악성 민원에 대한 강경한 대응 매뉴얼과 상담원의 감정노동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호 장치도 필요하다. 한 시중은행은 상담원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무실에 샌드백과 안마의자 등 휴게시설을 설치했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금융권 감정노동자들을 위해 정기적인 심리 상담과 검진 등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선량한 화이트 컨슈머에게까지 비용을 전가해 피해를 입히는 악성 민원을 근절할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고객#블랙컨슈머#사과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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