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기업 살리는 정책은 뭐든”… 野도 법인세 인하 동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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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수렁 속 한국/日, 정-관-재계 3각 협력]

1월 일본 정계의 최대 관심사는 사가(佐賀) 현 지사 선거였다.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하는 농협 개혁에 반발한 ‘전국농업협동조합중앙회’(JA전중)가 집중 지원한 무명의 무소속 후보가 자민당 텃밭에서 이기자 언론은 ‘사가의 난’이라고 부르며 충격을 전했다.

당시 자민당 내부에서는 “이런 분위기라면 농협법 개정안을 미뤄야 한다”는 반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월 9일 농협중앙회는 전국 700개 지역 농협의 상위기관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실질적 무기였던 감사권과 지도권을 폐지하고 2019년 3월까지 일반 법인으로 전환한다는 개혁안에 합의했다. 1954년 중앙회 제도가 도입된 이후 61년 만에 중앙회가 폐지되는 대개혁이었다.

일본에서 규제개혁이 너무 힘들어 돌처럼 단단한 ‘암반(巖盤) 규제’의 상징으로 꼽히던 농협중앙회가 무릎을 꿇은 것은 아베 총리의 뚝심 때문이었다. 농촌 평균 연령이 66세인 상태에서 이대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체결되면 농업 경쟁력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며 대국민 여론전을 펼친 게 주효했다. 아베 총리의 높은 지지율도 농협중앙회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압박이었다.

경제 사령탑으로서 아베 총리가 보여주고 있는 리더십은 한마디로 ‘친기업 정책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뚝심’이다. 지난해 6월 높이 247m로 도쿄(東京) 미나토(港) 구에 선보인 52층짜리 주상복합건물 ‘도라노몬(虎ノ門)힐스’가 도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로 문을 열게 된 과정이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2020년 도쿄 올림픽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2호선 도로를 지하화한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이는 정부가 도시재생특별촉진지구로 지정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주변에서 이용하지 않은 용적률을 다른 토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용적이전제도’라는 파격적인 조치로 용적률을 1150%까지 늘려줬다. 완공 후 영업 시작까지 채 한 달이 안 걸리도록 인허가도 초스피드로 해줬다. 준공식에 참석했던 아베 총리는 “규제를 대폭 풀 테니 기업은 더 적극적으로 부동산을 개발해 도쿄의 경쟁력을 높여 달라”고 독려했다. 쓰지 신고(십愼吾) 모리빌딩 사장은 “1조 엔(약 9조1600억 원)을 투자해 도쿄에 대형 빌딩 10개를 짓겠다”고 화답했다.

아베 총리의 정책 추진은 때로 정치권을 충격에 빠뜨릴 정도다. 지난해 말 일본에서는 8%로 인상한 소비세를 10%로 다시 올리는 2차 인상안을 두고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아베 총리는 “재정 건전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재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상을 연기하겠다”고 했다. 재무성의 반발이 가라앉지 않자 아예 ‘국민 의견을 묻겠다’며 중의원을 해산해버렸다. 그리고 12월 14일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다. 경기 활성화를 기대하는 민심이 그에게 압도적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

정계 일각에선 “총리 관저의 힘이 너무 강하다. 이건 독재나 마찬가지”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재계는 반기고 있다. 컨설팅회사 ‘라이로’의 다나베 신이치(田邊眞一) 회장은 “이전 민주당 정권은 복지에 집중했지만 아베 정권은 기업 살리기를 통한 경기 활성화에 집중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권을 끌어가는 힘이 탁월해 경제 주체들에게 활력을 주고 있다”며 “규제 완화도 피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경제를 직접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관저 5층 총리 집무실 벽에는 주가와 환율을 나타내는 전광판이 걸려 있다. 주가가 떨어지는 날이면 무엇이 문제인지 비서관을 불러 파악한다고 한다.

2월 24일 오전 도쿄 호텔에서 열린 해외 기관투자가들의 모임에도 총리가 직접 참석했다. 그는 법인세 인하 계획, 20여 개 규제 개혁 법안 처리 방침 등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투자를 호소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국인 투자자는 “한국 같으면 대통령이 이런 투자설명회에 나와 연설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총리의 모습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신뢰가 갔다”고 했다.

아베 총리가 속전속결로 경제 정책들을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높은 지지율과 경제 활성화에 한목소리를 내겠다는 야당 덕분이다. 1월 초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經團連) 등 경제 3단체가 주최한 신년 축하 행사에서 총리가 법인세율을 3.3%포인트 내리겠다고 하자 자민당 내부에서조차 신중론이 만만치 않았지만 야당은 침묵함으로써 사실상 동의를 표시했다. 일본 야당은 안보 정책, 역사 인식, 에너지 정책 등은 물론이고 엔화 약세 정책에 대해서도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지만 기업 활동 개선 법안만큼은 협력하고 있다. 따가운 국민 시선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일본 정부는 그동안 보수적인 분야로 알려진 노동 의료 개혁법안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최장 3년으로 묶여 있던 파견 근로자의 파견 기간을 무제한으로 풀어 인력 이동을 원활하게 하는 노동자 파견법 개정을 비롯해 연봉 1075만 엔(약 9870만 원) 이상 고소득 전문직에 한해 시간이 아닌 ‘성과’를 기준으로 임금을 지불하는 노동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공무원들은 소위 ‘군기’가 바짝 들었다. ‘한두 해 만에 바뀔 총리가 아니다’고 느끼면서 규제개혁 등 난제 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 도쿄에 파견을 나온 한국 정부 관계자는 “요즘 일본 공무원들이 일 처리하는 것을 보면 과거와 속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저게 가능할까’ 싶은 것들도 몇 달 후면 정책으로 나온다”고 놀라워했다.

도쿄=박형준 lovesong@donga.com·배극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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