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신 나치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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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얼마 전 일본의 한 재래시장에 갔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먹거리 이름을 한글로 써 놓은 곳도 있고,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상인도 있어 반가웠다. 찬찬히 구경을 하다 보니 한 좌판에 이런 문구가 쓰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일본 말을 못 하는 사람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순간 이게 뭔가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보니 한글을 알고 쓴 글씨가 아니라, 모양을 보고 따라 그린 필체였다. 영어도 중국어도 없이 오직 한글뿐이었다. 이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 즉 한국인을 콕 집어서 ‘너희들 꺼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일본 내에 혐한(嫌韓) 현상이 심해졌다더니 이 정도인가 싶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지나치는 일본인들이 다 나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일행들도 “그냥 한 가게의 팻말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라며 시무룩해졌다.

별일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는데 유독 마음이 상했던 이유는 뭘까. 설명할 수 없이 복잡 미묘한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며칠 전 이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일을 겪으면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이 유치원에서 학부모 교육이 있어 참석했다가 몇몇 엄마와 동네 커피숍을 찾은 날이었다. 어린이집 폭행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운 터라 대화 주제도 자연스레 그 문제로 이어졌다. 그런데 건너 테이블에서 우리 대화를 듣던 어르신 중 한 명이 “요즘 엄마들이 제 새끼 직접 안 키우고 나라 탓만 한다. 남의 손에 애 맡기고 커피 마시러 몰려다닌다”고 했다. 우리 테이블에 있던 전업주부들은 졸지에 ‘못된 것들’이 됐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어르신은 “몇 푼 번다고 애 팽개치고 직장에 나다닌다. 알뜰살뜰 사는 법들을 모른다”고 하셨다. 나를 포함한 워킹맘들은 순식간에 ‘돈만 아는 것들’이 됐다.

가뜩이나 보건복지부 장관이 전업주부와 워킹맘 사이를 홍해처럼 쩍 갈라놓아서 마음이 편치 않던 때였다. 정작 우리끼리는 잘 지내는데 왜 편을 나누고 난리인지 화가 나던 참이었다. 이런 와중에 어린이집 관련 기사의 댓글마다 등장하는 ‘커피충’ ‘돈벌레’라는 폭언을 오프라인으로 들으니 정말 씁쓸했다.

일본의 시장에서도, 동네 커피숍에서도 내 울컥함의 정체는 ‘싸잡힘’에 대한 반감이었다. ‘어어…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라는 당혹감, ‘한국 사람이 다 나쁜 놈도 아닌데’라는 억울함, ‘애를 두고 직장에 다니는 게 정말 못된 짓인가’라는 자격지심 등이 모두 싸잡아 욕을 먹는 데서 증폭된 것이었다.

어린이집 보육교사인 절친한 친구를 보면 싸잡아 욕하는 일의 무서움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동창 모임에서도 돌보는 아이들의 사진 자랑을 늘어놓다가 타박을 받을 만큼 아이들을 좋아하는 교사다. 그런 사람도 어린이집 교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선, 어린이집 교사들은 모두 교육을 엉망으로 받은 그룹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돌볼 때도 자꾸 위축된다고 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싸잡기 문화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담뱃값 인상 논란에 뜬금없이 ‘흡연충’이란 말이, 여성 관련 뉴스에는 어김없이 ‘김치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나와 다른 그룹에 속해 있으면 논쟁의 본질과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비하하는 단어가 넘쳐난다.

인터넷 댓글을 보다 보면 나치 시대를 닮아가는 듯한 두려움마저 든다. 유대인을 싸잡아 척결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폭력적이다. 내가 언제 어떤 게토(격리지역)에 갇힐지 모른다는 점은 더욱 무섭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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