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예술에 마음 여니 철이 따뜻해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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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래동 철공소 골목, 사장님과 예술가들 공존의 ‘합작 프로젝트’

12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사장들과 이곳에 새로 둥지를 튼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인포메이션센터 앞에서 웃고 있다(위). 
아래는 문래동 철공소 사장과 예술가가 함께 만든 공공화장실 현판을 붙이는 모습. 화장실 내부는 물론이고 현판 글자까지 함께 
만들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2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사장들과 이곳에 새로 둥지를 튼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인포메이션센터 앞에서 웃고 있다(위). 아래는 문래동 철공소 사장과 예술가가 함께 만든 공공화장실 현판을 붙이는 모습. 화장실 내부는 물론이고 현판 글자까지 함께 만들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이왕이면 잘해야지! 화살표는 여기 붙이고, 나비도 한 마리 붙일까?”

12일 찾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58번지 ‘철공소 골목’.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철공 일을 해온 박동주 사장(58)은 유지연 작가와 커다란 쇠파이프를 이리저리 맞춰 보느라 바빴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 오후 3시. 언뜻 거래처에 납품할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네 입구에 설치할 커다란 이정표를 만드는 중이다.

○ 문래동 철공소 골목의 속사정

“저 사람들 때문에 임대료가 엄청 올랐어요. 건물주가 나가랍니다.” “무슨 예술이야 예술은….”

1970, 80년대 큰 규모의 철공단지로 이름을 알렸던 문래동 58번지 일대. 몇 해 전부터 싼 임대료를 찾아 300여 명의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예술창작촌’으로 다시 유명해졌지만 남모를 속사정이 있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철공소 터줏대감들과 새로 둥지를 튼 예술가들 사이에 갈등이 적잖았던 것.

급기야 지난해 겨울, 이 골목에서 큰 행사가 열리고 난 뒤 때 아닌 철공소 사장들의 예술가 성토대회가 열렸다. 철공소와 예술가가 함께하는 것처럼 행사 홍보가 이뤄졌지만 정작 적잖은 철공소 사장들은 그런 행사가 있다는 걸 당일에야 알았다. 사장들은 ‘괜히 이용만 당한다’며 반발했다. 동네 곳곳에 용접작업용 보호장구 등 동네 특성을 활용한 철강 미술품이 세워지고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지며 ‘젊은이들의 예술과 낡은 철공 산업이 공존하는 모범 지역’으로 소개됐지만 사장들은 언제나 소외된 것처럼 느꼈다. 동네가 ‘관광코스’로 알려지며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허락 없이 철공소 풍경과 동료들의 사진을 찍어대는 것부터, “이제 관광명소가 됐으니 임대료를 올려주든가 나가 달라”는 건물주까지 생기면서 불만은 극에 달했고 각종 민원이 제기됐다.

○ 합작 프로젝트로 달라진 골목


풀잎 벽화가 그려진 공공화장실, 고양이 모양의 사진촬영 금지 푯말….

그랬던 문래동 철공소 골목이 최근 달라졌다.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철공소 사장과 예술가들의 ‘합작(合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문래예술공장’을 운영하는 서울문화재단 이현아 매니저는 “프로젝트 초반엔 워낙 감정의 골이 깊어 ‘잘될까’ 반신반의했다”며 “하지만 그간의 ‘보여주기’식 행사 말고, 소박하더라도 철공소 사장들이 처음부터 참여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서로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올해 4월, 근처 식당에서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첫 회의. ‘함께 동네에 필요한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에 철공소 사장들의 반응은 예상대로 시큰둥했다. 예술가들은 사장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마을 산악회까지 참여했다. ‘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자’며 시작된 산악회는 점점 규모가 커져 최근엔 50명 가까이 모였다. 지난달엔 동네에서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한 ‘철공소 사장님 용접 강연회’도 열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강사로 나선 맹근호 대양이엔지 사장(52)은 “젊은이들이 작품에 쓸 용접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을 땐 왠지 탐탁지 않았지만 그들과 호흡하면서 예술가, 예술 자체에 대한 내 마음도 열리더라”고 말했다.

마음의 문을 연 철공소 사장들은 올 9월부터 본격적으로 예술가들과 ‘팀’을 꾸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동네에 이정표, 사진촬영 금지 푯말, 공중화장실, 우편함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냈다. 철공소 남인기, 심운기 사장과 ‘사진촬영 금지 안내판’ 만들기 작업에 참여한 예병현 작가(35)는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간 어울리기 힘들었던 사장님들과 작가들이 더 따뜻한 마음으로 공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 문래동 철공소 골목은 12월 중순 사장과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 열 송년회 준비에 분주하다. 기세를 몰아 내년엔 사장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작품을 상품으로 개발까지 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수개월간 철공소 사장들과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대 만든 고양이, 나비 등 온갖 모양의 사진촬영 금지 푯말, 쇳덩이를 이어 붙여 만든 현판이 달린 공중화장실, 독특한 철공 작품들이 나붙은 문래동 인포메이션 센터는 이달 말까지 모두 완성될 예정이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문래동#철공소#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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