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칼럼]대통령의 겨울 준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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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 잃어가는 한국경제… 기술 넘어 혁신 무장하는 中
길고 추운 겨울 닥쳐오는데 정책과제들 겹치고 따로놀고
국가차원 비전도 전략도 없어
국가 혁신-발전의 큰 그림… 대통령이 국민 앞에 제시하고 양보와 인내 요청해야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교수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교수
스산한 가을 길을 따라 작은 저녁자리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정담이나 나누고자 했다. 그러나 세월이 어려운 탓일까. 투자 안 하는 기업 이야기에 일자리 찾다 절망하는 젊은이들 이야기 등, 세상 걱정에 나라 걱정이 이어졌다.

이리저리 세상에 잘 알려진 사람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면 대단한 역사야. 하지만 앞쪽으로는 빛이 보이지 않아.”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길고 추운 겨울이 오려나 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에 장관을 지낸 한 참석자가 중국 이야기를 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 지도자들의 주된 관심은 기업 유치와 투자 유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공장을 지어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산업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이들의 관심은 바로 기술 쪽으로 옮겨갔다. 수시로 기술 인력과 연구소 등을 옮겨 올 수 없느냐 물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도 아니다. 기술에서도 자신이 생긴 탓이다. 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혁신, 즉 그들이 말하는 ‘창신(創新)’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하겠는가에 있다. 혁신을 통해 ‘굴기(굴起)’, 즉 스스로 더 크게 일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주도하는 반(反)부패 개혁과 금융 개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속 혁신을 위한 플랫폼을 갖추자는 의미이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후발 주자인 중국이 저렇게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하고, 혁신을 통한 ‘굴기’를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국가적 차원의 비전과 전략이 없다. ‘선진 일류국가’에 ‘국민 행복’ 등 수사적 표현은 많다. 그러나 공유된 그림도, 이를 위한 노력도 없다. 자연히 모든 정책과제가 개별적으로 떨어져 존재한다. 그 결과 의미가 반감되기도 하고 과제 간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큰 그림이 없다 보니 무슨 문제든 말썽이 나고서야 과제가 된다. 안전 문제와 공무원연금 개혁 등 최근 불거진 문제들도 다 그렇다.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일이 터져야 반응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돼 가고 있다.

혁신 또한 구호만 있을 뿐 실질적인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의 예가 되겠지만 혁신을 자극하지도, 혁신이 일어나는 쪽으로 돈을 보내지도 못하는 금융체제를 그냥 두고 보고 있다. 혁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낮은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당시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한미 FTA는 시장 혁신을 위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산업구조 조정 등 시장부문의 혁신이 필요했으나 정부는 자본도 노동도 이동시킬 힘이 없었다. 결국 일정량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시장 개방을 해야만 했다. 시장의 힘과 압력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는 한미 FTA가 가져올 직접적인 이익과 손실에 집중됐다. 진보 쪽은 ‘혁신’을 위한 아무런 대안 없이 반대만 했고, 보수 쪽은 ‘혁신’이 불러올 고통에 대한 고민 없이 대박의 꿈만 꾸었다. 그 결과 개방이 불러올 혁신과 그에 따른 고통을 잘 관리하는 문제 등은 제대로 논의할 수가 없었다. 혁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일이다.

국가 차원의 기획이 강조되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자리에서의 이야기는 그렇다. 국가 발전을 위한 큰 틀의 고민을 하자는 것이다. 또 그 일환으로 지속 혁신의 기반을 조성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여의도 정치권은 분명 아니다. 정치권은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주범이다. 국가 발전에 대한 고민 없이 오로지 이기고 지는 문제에만 집착한 것이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앞으로도 별 변화 없이 그럴 것이다.

대통령이다. 대통령 이외에는 다른 주체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문제가 터지면 반응하는 일은 총리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공무원연금 개혁처럼 기회에 편승하는 듯한 일도 자제해야 한다. 그 대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큰 그림을 내놓고 그 위에서 혁신을 말해야 한다. 또 그러한 맥락에서 국민 모두를 향해 큰 틀의 양보와 인내를 요청해야 한다.

겨울이 바로 눈앞에 있다. 제대로 된, 대통령다운 겨울 준비를 하라. 국민이 희망의 빛을 보게 하라.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교수 bjkim36@daum.net
#한미 자유무역협정#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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