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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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서태지의 팬이었던 적은 없다. 데뷔 무대를 TV로 본 건 고2 때다. 흥미롭고 강렬하고 명료했지만 취향 밖이었다.

취향에 상관없이 그의 음악과 팬덤을 둘러싼 이야기는 20대 중반까지 어떤 경로로든 눈과 귀에 흘러들어왔다. 하나의 대중문화 요소가 그렇게 긴 시간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가 국내에 또 있었을까.

서태지 팬덤은 2012년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재현한 H.O.T. 팬덤과는 결이 좀 다른 느낌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후자의 구심점이 ‘피 끓는 애정’이라면 전자의 동력원은 ‘존경과 자부심’인 듯했다.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컴백 TV 쇼를 챙겨 보면서도 서태지의 노래에 몰입하지 못한 까닭에는 팬덤의 양상에 대한 그런 이해(혹은 오해)도 있었다. 특정 음악을 선호하는 집단적 취향이 은근하든 노골적이든 경계를 갈라짓는 기색을 내비치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

몇 해 만인지. 서태지가 어렵사리 다시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는 과정을 띄엄띄엄 지켜봤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사랑을 뛰어넘어 경외에 가까운 열광을 한 손에 끌어 쥐었던 그가 왜 저토록 거센 비난 포화를 맞는 걸까. 팬덤 일각에서 제기한 ‘배신감’의 정체는 뭘까. 비난의 대상은, 오래전 경외의 대상은, 서태지 개인이었을까 그의 음악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에 형성된 어떤 다른 무엇이었을까.

한때 사람들은 그를 두고 “젊은 세대의 억눌린 심정을 대변한다”고 했다. ‘문화대통령’이라는 민망한 호칭이 붙은 데는 그런 평판도 상당히 작용했을 거다. 그럭저럭 무사히 복귀 인사를 마친 지난주 이전의 서태지에 대한 인터넷 포털 안팎 분위기는 어땠나. 하야한 뒤 망명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옛 권력자에 대한 들끓는 구설에 다름없었다.

음악을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저항의 심정을 표출한 대중음악인은 허다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의 ‘교실 이데아’가 유독 각별한 주목을 받은 건 경쾌한 사랑 노래로 인기를 얻은 스타의 전향적 메시지이기 때문이었다. “머리 속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던 “전국 900만의 아이들”은 짜릿하고 후련한 저항의 대리만족에 열광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서태지라는 이름은 차츰 음악에 앞서 하나의 큼직한 현상처럼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서태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2 같은 반에 록 음악을 즐겨 듣는다며 ‘저항’에 대해 이야기하던 친구가 있었다. 하굣길 뒤집어쓴 헤드폰 사이로 베이스 소리가 가냘프게 삐져나오곤 했다.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20대 때 사회비판 메시지를 노래에 담던 이가 나이 들어 복잡한 가정사를 겪었다. 새로 들고 온 음악의 색깔은 당연히 조금 달라졌다. 그걸 두고 배신을 이야기한다면 그거야말로 파렴치한 배신이다.

이미 듣지 않았나.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메시지 짙은 음악 뒤에 숨는 것으로는, 영원히 어떤 메시지도 전할 수 없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서태지#저항#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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