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칼럼]재난의 학습효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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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안녕들 하십니까?” 지난해 코레일 노조 파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촉구한 고려대 학생의 대자보 제목이지만 요즘엔 아무나 붙들고 묻고 싶은 말이다. 세월호 사고 직후엔 여객선 그림만 봐도 가슴이 쿵쿵거렸는데 요사이엔 길거리에 환풍구밖에 안 보인다. 싱크홀 괴담에다 이순신대교의 상판이 1m 이상 흔들렸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영화 ‘데스티네이션’처럼 주변의 온갖 사물과 상황이 나를 향한 흉기가 되는 것 같다.

2014년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재난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 항공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거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재난 중의 재난은 에볼라다. 치사율 90%의 에볼라 사망자가 5000명에 근접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재난은 인명을 해치는 차원이 아니다. 산업과 경제에 주는 타격 때문에 더 무섭다. 재난에 대한 공포심만으로도 경제가 마비되고 문명이 붕괴될 정도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4년 글로벌 리스크를 보면 총 10개의 리스크 가운데 5개가 재난과 관련된 것이다. 리스크 1, 2위는 주요 국가의 재정위기, 구조적인 실업률이지만 3위가 수자원 위기, 5위가 기후변화에 대한 취약한 대응능력, 6위가 극한 기상재난이다. 이는 경제 사회 문제 못지않게 재난 관리가 각국의 중요한 의제임을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에볼라에서 완치된 간호사를 백악관으로 불러 포옹한 것도 고도의 리스크 관리 행위다.

우리의 리스크 관리는 어떤가. 어느 나라든 재난은 일어나지만 우리의 문제는 후진국형 재난이 일어나고 재난 수습도 재난 수준이라는 점이다. 한국적 재난의 특징은 첫째, 대부분이 인적(人的) 오류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100년에 한두 번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순수한 자연재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설계를 잘못했거나, 부실하게 시공했거나, 조작자가 실수를 했거나,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사고가 난다.

둘째, 재난 수습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너무 심하다. 때로는 재난 뒤의 분란이 재난 그 자체보다 더 큰 피해와 후유증을 가져오기도 한다. 재난을 발생시킨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은 재발 방지 차원에서 중요하다. 미국도 9·11테러나 초강력 태풍 카트리나 같은 재난을 겪은 후 그런 과정을 거쳐 시스템을 정비해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시스템을 고치기 위한 건강한 갈등과 토론이 아니라 희생양을 찾아다니는 ‘마녀사냥’이 횡행한다.

셋째, 사고를 빨리 잊는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도 이전에 있었던 그 숱한 사고를 잊어버렸기에 발생했다. 책임질 사람 몇몇을 감옥에 넣으면 그걸로 끝이다. 박근혜 정부는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만들었지만 예산과 인력 면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안전’이란 용어가 들어간 법안 발의가 128건이나 되었지만 처리된 건 없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 냄비 속성은 안전한 사회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유산이다.

평생 재난을 연구해온 찰스 페로 예일대 교수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정상’이다. 고도로 복잡한 과학기술 중심 사회에서는 아무리 효율적인 안전장치를 동원해도 피할 수 없는 사고가 있다는 의미다. 현대사회에서 위험은 일상화돼 있고 사고는 그것이 표출되는 것에 불과하다.

얼마 전 경기 성남시 판교에서 환풍구가 붕괴하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수습 과정은 세월호와 판이하게 달랐다. 사고를 개인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의식은 세월호의 학습효과일 것이다. 하늘이 무너질라, 땅이 꺼질라.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국민은 재난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정치만이 아직 국민을 못 쫓아오는 것 같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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