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男꽃女’ 보험설계사… 박사급도 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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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아줌마’는 옛말… 대졸 신입 비중 절반 넘어

“공기업에서 대리로 승진해 연봉이 늘어 친구 소개로 보험설계사로부터 상담을 받았어요. 그런데 상담받는 내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 이 사람 참 부럽다’는 거였어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박주현 씨(31·여). ‘신(神)도 부러워한다’는 공기업에서 입사 2년 만에 대리로 승진할 정도로 인정받던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올해 1월부터 삼성생명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남들은 안정적인 직업이어서 좋다는데, 오히려 그 점이 싫었어요. 능력을 발휘하는 대로 인정받을 수 있고,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에도 맞아 보험설계사가 딱이다 싶었죠.”

한때 ‘아줌마 직업’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보험설계사 직종에서 박 씨처럼 고학력에 전문성까지 갖춘 청년들의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삼성화재 표준채널 소속 보험설계사 중 전문대 졸업자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 말 전체 2만2900명 중 3893명으로 17%에서 지난해 말 8276명(32%)으로 높아졌다. 또 지난해 시작한 신입 보험설계자 중에서는 대졸자가 56.4%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젊은 피’의 수혈은 보험설계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 바꾸고 있다. 한화생명의 한 관계자는 “인맥 위주의 영업에서 벗어나 전문성을 무기로 영업하는 대졸 신입 설계사가 늘면서 보험설계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고 지원자들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도 철저히 실적에 따라 평가받는 일자리의 성격이 요즘 청년들의 취향에 잘 맞는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삼성화재의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는 구범준 씨(27)는 “적당히 스펙에 맞춰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은 제한된 역할만 하고 있지만 설계사는 전적으로 자기가 하기에 달렸다”면서 “‘완전 성과제’는 부담이지만 동시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웬만한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보다 연봉이 높아 10개월 만에 학자금 대출을 모두 갚았고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자랑했다.

보험상품만 구입하지 않고 보험설계사에게 전문적인 재무설계를 요구하는 고객이 늘어난다는 점도 고학력 보험설계사가 증가한 중요한 이유다. 구 씨는 고객을 만나러 갈 때 반드시 태블릿PC를 챙긴다. 상담을 하면서 태블릿PC를 이용해 상품을 설명하고,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맞춰 눈 앞에서 필요한 보험료를 계산해 제시한다. 구 씨는 “태블릿PC의 시각적 효과와 데이터를 이용해 상품을 안내하면 고객들이 훨씬 더 집중하고 신뢰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보험, 카드, 펀드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한꺼번에 파는 복합금융의 확대는 보험설계사에게 필요한 ‘스펙’을 바꾸고 있다. 현대해상 관계자는 “자산가들의 경우 좀 더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재무설계를 원하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졸 설계사 전담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생명 설계사인 박주현 씨는 손해보험설계사 자격증과 펀드투자상담사, 증권투자상담사, 한국공인재무설계사(AFPK) 자격증을 갖추고 있다. 한꺼번에 보험과 카드, 펀드까지 상담하고 판매할 수 있는 것이다.

대졸 설계사의 증가에는 청년 취업난과 고용 불안이 한몫한다. 삼성화재 이정식 씨(29)는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20년 넘게 보험설계사 일을 한 어머니를 이어 보험설계사의 길을 선택했다. 이 씨는 “전공을 살려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잘되지 않았다”며 “경기 용인시에서 ‘보험왕’으로 통하는 어머니가 ‘방바닥만 긁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며 설계사 일을 추천해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고용 불안이 단점일 수 있지만, 요즘 일반 기업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라며 “오히려 설계사는 정년이 없어 좋다”고 덧붙였다.

다만 젊음이 강점만은 아니다. 장기계약이 많은 보험상품의 특성상 ‘결혼도 안 한 젊은 설계사가 보험만 팔고 금방 관둬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고객들의 시각이 부담이다. 이런 점 때문에 삼성화재 보험설계사 곽정한 씨(30)는 “보험상품을 설명하기 전에 고객들에게 최대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 일을 하는지 설명한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 열정이 있구나, 고객을 버리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게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보험설계사#삼성생명#대졸 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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