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문장을 쓰지 못해도 너는 이제부터 작가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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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어머니
[잊지 못할 말 한마디]김희재(시나리오 작가·추계예술대 문학영상대 교수)

김희재(시나리오 작가·추계예술대 문학영상대 교수)
김희재(시나리오 작가·추계예술대 문학영상대 교수)
아홉 살 위의 큰언니는 흔히 이야기하는 ‘똑똑한 아이’였다고 했다. 또래보다 일찍 말을 하고 또래보다 일찍 글을 쓰고 음정 박자 잘 맞춰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아이. 그 밑으로 태어난 여섯 살 위의 둘째 언니는 ‘늦된 천재’였다고 했다. 두 살을 넘기도록 기저귀를 떼지 못했고 말도 느려 혹시 바보가 아닐까 하는 어른들의 걱정을 사는 아이. 그런데 세 살 조금 넘어갔을 때 두부 한 모가 2원 50전이면 두 모에 5원이라는 계산을 했다던가.

똑똑한 큰딸과 천재 언저리의 둘째 딸을 가진 부모에게 6년 뒤 느긋하게 찾아든 막내는 그저 귀염둥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글을 읽고 셈을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그 무엇을 해도 언니들은 훨씬 이른 나이에 잘 해냈으니 신기할 것도 기특할 것도 없다는 반응. 그보다 분하고 억울한 것은 그런 까닭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일찍 배워봐야 소용없어. 학교 들어가면 다 배울 거야. 그러니까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면 돼. 아니다. 넌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찌감치 한글과 산수와 한자와 영어까지 깨친 둘째를 다섯 살에 입학시켰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 어머니께는 실패 아닌 실패였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막내는 다섯 살이 되도록 읽기, 쓰기를 금지시켰다. 함께 살던 막내 외삼촌이 고등학생이었으니 집안에 초중고생이 다 있었지만 막내인 나는 누구에게도 한글을 배울 수 없었다.

금지당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크고 귀하고 탐스러워 욕망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그것은 다섯 살 꼬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렵게 확보한 공책 한 권과 연필을 들고 옆집 친구에게 갔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친구가 아니라 두 살 위 언니였다) ‘수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친구에게 한글과 덧셈 뺄셈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도둑질로 배운 한글을 앞세워 조금 일찍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힙 겹게 배운 한글, 어렵게 쟁취한 학생 신분은 그래서 내게 귀하고 귀했다.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고 싶었고, 머릿속에 떠다니는 모든 것을 쓰고 싶었다. 눈에 띄는 모든 책을 아무거나 읽었고 아무 데나 생각을 적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가 아무 데나 끼적거려 놓은 것들을 차곡하게 모아 내 앞에 놓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후에 네가 단 하나의 문장을 쓰지 못하고, 단 하나의 작품을 쓰지 못해도 너는 이미 작가야. 엄마한테는 그래.”

초등학교 3학년, 여덟 살 막내에게 해주신 말씀이었다.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한 배경 이야기는 아주 오랜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방 청소를 하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써놓은 무엇인가를 보고 조금 놀란 듯하다. 시하고 비슷한 모양을 갖춘 단상이었을 텐데 아마 별것 아니었겠지만 마냥 어린 막내로만 생각했던 녀석이 쓴 것이라 더 많이 놀란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갖고 큰언니가 다니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상담을 하셨다고 했다. 작가로 키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으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작가로 키우겠다고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글을 쓰라고 한 적이 없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라고 한 적도 없다. 그저 너는 이미 작가라고. 단 하나의 문장도 쓰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러하다고 딱 한 번 말씀했을 뿐이다. 여러 동네를 기웃거렸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한 말씀이 주술이 된 듯 작가의 길로 돌아왔다.

교수로 회사 대표로 작가로 살아가는 이즈음 많은 이가 묻는다. 어떻게 불리는 게 가장 편하냐. 나는 대답한다.

“교수도 정년퇴직을 하고, 대표도 언젠가 물러날 자리지만 작가는 죽을 때까지니까요. 작가가 좋습니다.”

그 대답 뒤에는 이런 혼잣말이 숨어 있다.

‘단 한 줄을 쓰지 못한다 해도 나는 여덟 살 그때부터 내 어머니께 작가였습니다.’

김희재(시나리오 작가·추계예술대 문학영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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