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민 작가 “이 시대의 정도전, 우린 받아들일 수 있는가”

  • 스포츠동아
  • 입력 2014년 6월 27일 06시 55분


드라마에서 대본은 건축의 설계도에 비유된다. ‘정도전’의 정밀하면서도 안정된 설계도는 신인 정현민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드라마에서 대본은 건축의 설계도에 비유된다. ‘정도전’의 정밀하면서도 안정된 설계도는 신인 정현민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 대하사극 ‘정도전’ 집필 정현민 작가

의원 보좌관 10년 끝에 무당파
마흔에 새로운 꿈 작가에 도전

매일 리포트 쓰듯 대본과 씨름
그래도 배우 연기력에 큰 혜택

‘환상의 커플’ 홍자매 작가의 팬
난 로맨틱 코미디엔 자신 없어


최소 10년 이상의 공력을 갖춘 베테랑 작가들만 가능하다는 대하사극을 이제 데뷔 4년차의 신인이 보란 듯이 해냈다.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의 대본을 집필한 정현민 작가(44). 29일 ‘정도전’ 종영을 앞두고 그는 쏟아지는 인터뷰 제의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작품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호평 받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특이한 이력을 지닌 그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탓이기도 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겁 없이 ‘정도전’을 썼다는 정 작가는 “메뚜기도 한 철 아니겠냐”는 겸손한 인사와 함께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야기꾼’다운 면모를 인터뷰 내내 여과 없이 풀어냈다.

● “매일 대학 리포트 쓰는 기분…연기의 신(神)들 만난 건 행운”

‘정도전’은 그동안 역사에서 주변 인물로 평가됐던 정도전을 재조명했고, 동시에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호평 받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대사는 현실에서 자주 회자됐고, 자연스럽게 정현민 작가의 필력에도 관심이 쏟아졌다.

연출자 강병택 PD의 제의를 받고 호기롭게 시작한 집필이지만, 중반을 넘기면서는 매일 머리가 짜릿짜릿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긴장성 두통”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여느 드라마처럼 감성에 이끌려 쓰는 것이 아닌 매일매일 리포트를 쓰는 듯한 작업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수백여편의 사료와 논문을 옆에 두고 늘 확인을 하면서 대본을 썼다. 내가 100% 이해하지 못하면 대본은 어김없이 한두 줄 진행되다 멈췄다. 자문 역의 학자와 전문가들로부터 ‘사료에 충실한 사극’이라는 평가를 듣고 나서야 안도했다”고 말했다.

●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정치 판타지 없어 가능”

정치인들에게는 따끔한 비수가 되었을 ‘정도전’ 속 대사는 대부분 ‘조선경국전’, ‘조선왕조실록’ 등 실제 역사 속에서 따왔다. 하지만 기록 속 한 구절로 남은 이야기를 살아있는 대사로 흥미롭게 옮길 수 있었던 건 분명 정 작가의 힘이다. 10년간 국회에서 보좌관으로 활약한 경험은 특히 다양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예컨대 이인임은 호탕한 웃음 속에 칼을 숨긴 다선 의원들, 정도전은 1970∼80년대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썼다.

정도전, 이성계, 이인임 등 역사 속 인물에 현 정치인의 모습이 투영돼 있는 것은 아닌지 세간의 궁금증도 컸다. 정 작가는 “정치권에서 일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판타지는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투영시키는 것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를 무시한 건방진 처사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는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파’다. 그래서 다양한 캐릭터가 나올 수 있었다. 특정 정당을 지지했다면 이미 시청자가 눈치챘을 것이다”며 웃었다.
‘정도전’ 속 주인공 정도전의 활약을 담은 장면들. 사진제공|KBS
‘정도전’ 속 주인공 정도전의 활약을 담은 장면들. 사진제공|KBS

● 홍자매 작가 열성팬, 그러나 “차기작에 로코는 없다”

정 작가는 나이 마흔에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늦깎이 작가’다. 그는 “한 가지 일만 하는 건 드라마를 쓰고 있는 요즘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늘 무언가를 겸했다. 보좌관을 할 때도 대학원을 다니거나 드라마 작가교육원을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이었고, 생존본능의 보험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회상했다.

꿈은 친구의 한 마디가 기폭제로 작용했다. 정 작가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경험으로 세상을 이상적으로 보는 친구가 드라마 작가교육원에 다니는 내게 말했다. ‘남자 나이 마흔이면 이제 새로운 꿈을 꿀 수 없다’고. 슬펐다. 그 친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를 꿈꾸기 전 정 작가는 드라마 ‘환상의 커플’을 집필한 ‘홍자매’ 홍정은·홍미란 작가의 열성 팬이었다. 30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끝까지 본 드라마도 ‘환상의 커플’ 뿐이다. 지금까지 서른번 넘게 돌려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다.

홍자매처럼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욕심은 없느냐고 묻자 “그것만 빼고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아직은 내가 직접 기획할 ‘짬밥’은 아니다. 작가로서 이제 한 걸음을 뗐을 뿐이다. 차기작도 원작이 있는 것이면, 또 연출자와 협업이 가능한 작업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도전을 역사 속에서 꺼내놓은 그에게, 지금 이 시대에 정도전은 있느냐고 물었다.

“분명 있다. 지금은 다들 (이념적·정치적으로)싸우고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서는 리더가 탄생한다.”

그는 되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도전을 받아들인 준비가 된 걸까. 감정적이고 냉소적으로 정치를 바라보고 있어 이미 존재하는 정도전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Clip : 정현민 작가는?

1970년 부산 출생.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경남 창원의 한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노조에서 노보를 만들다 기자가 되고 싶어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노동전문 매체인 매일노동뉴스의 기자로 활동하다 10년간 이경재(새누리당)·박인상(전 민주당) 등 여야 의원의 보좌관 역임. 2009년 KBS 극본공모에 당선돼 작가로 데뷔. 2010년 ‘자유인 이회영’을 시작으로 ‘프레지던트’, ‘사랑아 사랑아’, 단막극 ‘남자가 운다’ ‘올레길 그 여자’ 등을 썼다.

김민정 기자 ricky337@donga.com 트위터 @ricky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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