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마지막 집세-공과금 70만원 남기고 떠난 세 母女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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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만이 그들을 자유롭게 했을까

“죄송합니다” 2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반지하 방에 살던 박모씨가 두 딸과 함께 목숨을 끊기 전 집주인에게 남긴 메모. 송파경찰서 제공
“죄송합니다” 2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반지하 방에 살던 박모씨가 두 딸과 함께 목숨을 끊기 전 집주인에게 남긴 메모. 송파경찰서 제공
박모 씨(61·여)는 8년 전부터 큰딸(36), 작은딸(33)과 서울 송파구 석촌동 반지하 주택에서 살았다. 이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작은 방 2개, 화장실과 부엌으로 이뤄진 10평 남짓한 공간에 살면서 구형 폴더 휴대전화 1대를 함께 사용할 정도였다. 박 씨는 12년 전 남편이 방광암으로 사망한 뒤 식당 일을 하며 홀로 생계를 책임졌다.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심하게 앓아 일을 하지 못했고, 작은딸은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일정한 직장이 없었다.

세 모녀는 26일 오전 8시 30분경 허름한 자택 침실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 씨는 침대에, 두 딸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는 타다 남은 번개탄 1개가 은색 냄비 안에 담겨 있었다. 창문과 문 틈새는 연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청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방 구석의 종이박스 안에는 세 모녀가 키우던 고양이도 함께 죽어있었다. 가난한 가족의 슬픈 자살이었다.

침실 서랍장 위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앞면에는 검은색 사인펜으로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 안에는 현금 5만 원짜리 14장으로 70만 원이 들어 있었다. 8년 동안 함께 산 집주인 임모 씨(73) 부부에게 남긴 거였다. 세 모녀는 매달 20일 월세와 전기, 수도, 가스비 등 공과금을 내왔는데 8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보증금 500만 원도 그대로였다. 38만 원이었던 월세는 지난해 1월부터 50만 원으로 올랐다. 공과금은 매달 20여만 원 정도 나왔다. 오른 월세와 공과금은 세 모녀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송파경찰서는 박 씨 가족이 20일 동네에서 600원짜리 번개탄 2개와 1500원짜리 숯 1개를 산 것으로 미루어 그즈음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로 보고 있다.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는 큰딸이 혈압과 당뇨수치를 직접 기록한 수첩이 발견됐지만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은 없었다. 두 딸은 신용카드 대금이 밀려 신용불량자 상태였다.

27일 찾은 세 모녀의 침실은 사람 셋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벽지가 낡고 해져 구석마다 콘크리트 벽이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두 딸이 썼던 방에 나란히 설치된 컴퓨터 모니터 2대는 노랗게 변색돼 있을 만큼 심하게 낡아 있었다. 우편함에는 이달 가스요금으로 12만9000원이 적힌 고지서가 꽂혀 있었다.

박 씨는 지난달 오른팔을 다쳐 식당 일을 못 하게 된 이후 생활고가 더 심해졌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떠날 만큼 집주인 부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했다.

임 씨는 27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집에 TV가 켜져 있길래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전기세 고지서를 전해 주러 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자 이상한 마음에 경찰에 신고했다”며 “벽지가 뜯어지고 낡아 도배를 새로 해준다고 해도 ‘부담 되실 텐데 괜찮다’며 거절할 만큼 착한 가족이었는데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조동주 djc@donga.com·황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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