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 틀 깨고 ‘능청스러운 이야기꾼’으로 돌아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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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집 ‘황천기담’ 낸 임철우 작가

연작소설 ‘황천기담’을 펴낸 소설가 임철우는 “내가 하려는 얘기 자체가 달라진 게 아니라 다르게 얘기하고 싶었다”면서 “리얼리즘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상상력을 펼치다 보니 풍성한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간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연작소설 ‘황천기담’을 펴낸 소설가 임철우는 “내가 하려는 얘기 자체가 달라진 게 아니라 다르게 얘기하고 싶었다”면서 “리얼리즘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상상력을 펼치다 보니 풍성한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간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4·3사건, 6·25전쟁과 분단, 5·18민주화운동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그려 온 소설가 임철우(60)가 능청스러운 이야기꾼으로 돌아왔다. 최근 펴낸 연작소설집 ‘황천기담’(문학동네)에는 허황되지만 어디에선가 일어났을 법도 한 ‘썰’이 각양각색의 인물과 촘촘하게 얽혀 있다.

21일 서울 대학로의 오래된 다방에서 만난 작가는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동안 벽 잡고 씨름하듯 고통스럽게 써왔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황천’ 연작을 집필하면서 비로소 쓰는 재미를 느꼈다.”

그에게 글을 쓰게 한 것은 5·18이었다. 1980년 당시 그는 전남대 영문과 4학년 복학생이었다. 5·18을 보고 듣고 겪은 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5월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0여 년에 걸쳐 다섯 권짜리 장편소설 ‘봄날’(문학과지성사)을 1998년 완성했다. 광주는 장편 ‘백년여관’(2004년·한겨레신문사)에도 등장한다. 그는 “광주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건 변함없지만 ‘백년여관’을 쓰고 나서부터는 스스로를 옭아맨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황천기담’에는 2004년 겨울 무렵부터 몇 년간 띄엄띄엄 발표한 단편소설 5편을 묶었다.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공간 황천이 배경이다. 저승을 뜻하는 황천(黃泉)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곳은 금광이 있던 욕망의 집결지 황천(黃川)이다.

“현재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총체다. 나는 2014년에 있지만 1963년, 1980년, 2005년의 나이기도 하다. 5·18이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금의 우리와 무관한 일로 치부해버린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황천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모여 사는 곳, 그들이 가진 욕망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다.”

작가의 설명은 묵직한 무게로 다가오지만 그가 그리는 황천의 인물들은 웃기고 황당하며 비밀스럽고 짠하다. 동네 아주머니나 지인이 잘 아는 사람이 경험했다면서 작가에게 귀띔한 이상한 일들을 끌어와 상상력으로 직조했다. ‘칠선녀주’에서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천하명주 칠선녀주를 둘러싼 황천주조장의 여인 삼대가 등장하고, ‘황금귀(黃金鬼)’에서는 황금에 집착했던 한 사내가 36년 만에 금광을 빠져나와 가랑이 사이로 괴물을 쏟아내며, ‘월녀’에서는 황천의 흥망성쇠를 겪은 월녀와 주변의 혼령들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답답하고 무겁고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대표주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그가 기존의 작품과 전혀 다른 황천 연작을 쓴 배경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기도 한 그가 글쓰기를 가르친 지 올해로 20년째. 월북하고 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나오는 자신의 분단소설 ‘아버지의 땅’을 두고 요즘 학생들은 시대적 배경과 역사를 보지 못한 채 무책임한 아버지를 둔 가족 이야기로 쉽게 읽어버린다고 했다.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 자체가 달라졌다. 단편적이고 단순화된 패턴에 익숙해져서 이야기의 틀만 보고 내면을 못 읽는다. 문학적 장치를 간파하지 못한다. 이런 독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현실이 변한다면 문학도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먼저 독자와 소통을 해야 하니까.”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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