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성호]“울지 마, 석희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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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사회부 기자
이성호 사회부 기자
“다른 많은 분들이 금메달을 기대하셨는데 제가 성적이 못 미친 것에 대해서 조금 죄송한 마음도 있고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은메달을 딴 심석희(17)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세계 2위의 빛나는 성적에도 표정은 어두웠다. 1위를 질주하다 막판에 역전을 당하며 메달 색깔이 바뀌었기 때문에 심석희 본인의 아쉬움은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쇼트트랙 첫 금메달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심석희가 울먹이면서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가 은메달을 딴 것은 실수도 아니고 실패는 더욱 아니다. 도대체 열일곱 여고생까지 ‘대국민 사과’를 하게 만든 배경은 무엇일까.

‘금메달 지상주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종합 4위를 차지했다. 금메달 수는 무려 12개였다. 이전까지 딴 금메달(7개)보다 훨씬 많았다. 국민들은 하루걸러 한 명꼴로 탄생하는 금메달리스트에 환호했다. 은·동메달도 21개나 나왔지만 금메달 빛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은이나 동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일부 외신은 이런 모습을 ‘승자 독식’에 빗대기도 했다.

이후 몇 번의 올림픽이 이어지면서 선수들은 물론 국민들의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 금메달리스트가 아니어도, 꼭 메달을 따지 못해도 격려와 축하를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날 심석희의 눈물을 보면 한국은 아직도 ‘스포츠 선진국’까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공교롭게도 심석희가 은메달을 딴 날 러시아의 빅토르 안(안현수·29)은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의 귀화 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일단 ‘파벌 싸움’의 진실은 둘째 치고 그가 부상 등으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재기가 쉽지 않았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 쇼트트랙은 잘나가는 효자 종목이고 새로운 유망주 수혈이 끊이지 않고 이뤄졌다. 금메달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황제의 부활’을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승자 독식에 너그러운 반면 실패(또는 실수)에 엄격한 분위기다. 비단 스포츠 선수뿐 아니라 창업이나 신기술 개발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이들이 재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 조직이나 사회는 이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타의에 의해 “이제 끝났다”는 평가가 내려졌던 안현수가 다시 씩씩하게 얼음판을 지치는 모습에 국민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그가 역경을 딛고 재기했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준 것은 한국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4년 뒤 평창에서 심석희의 눈물을 또 보게 될까 걱정스럽다.

이성호 사회부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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