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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여성시대]6부 나는 엄마다<下>자식이야말로 내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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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여성시대]6부 나는 엄마다<下>자식이야말로 내 존재의 이유

김지영 기자 입력 2013-12-26 03:00수정 2014-08-2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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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자녀에게 무한정의 사랑을 베푸는 존재다. ‘나는 엄마다’ 상편에서는 절망을 이겨내고 자식들을 위해 우뚝 선 엄마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하편에서는 저출산 시대라고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는 엄마들을 소개한다. 지하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일곱 아이를 낳아 키운 엄마, 대리운전과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키워낸 엄마 등 자식을 지키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지옥 같은 삶도 마다하지 않은 엄마들의 이야기다. 》

“엄마만이 아이를 지킬 수 있다”는 다둥이 엄마 이명순 씨, 자녀들 덕분에 장애도, 힘든 직업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는 강석란 씨,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엄마여서 사랑한다는 양정숙 씨(왼쪽 사진부터). 인생의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자식’이라고 말하는 엄마들이 자녀들과 함께했다. 이명순·강석란·양정숙 씨 제공

“엄마만이 아이를 지킬 수 있다”
● 일곱 아이의 엄마 이명순 (50·인천 서구)


나는 다둥이 엄마다. 스물다섯에 첫아이를 출산했고 지금까지 모두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다. 작정하고 낳은 건 아니었다. 종교적 이유로 자연피임을 했는데 방법을 정확히 몰라 아이를 많이 갖게 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낙태는 피하려고 애썼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어서였다.


주변에서 ‘외계인이다’ ‘정신이 나갔다’는 소리도 꽤나 들었다. 특히 넷째, 여섯째를 낳을 때 주위 반대가 심했던 생각이 난다. 전남 진도에서 양화점 사장을 하던 남편이 기성화에 밀려 가게 문을 닫고, 서울로 올라와 건설노동자 일을 할 때였다. 아들 셋을 키우면서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다. 남들은 셋도 많다지만 나는 키울 만했다. 살림 잘 꾸려가면서 살고 있는데 임신인 걸 알게 됐다. 낳겠다고 하니 친정에서 반대가 엄청 심했고 시댁엔 얘기도 못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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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출산장려정책으로 병원비도 지원되지만 그때는 셋째부터는 의료보험 혜택도 안 됐다. 돈 아낀다고 병원에 잘 안 가다가 임신 6개월이 돼서야 병원을 갔다. 그런데 의사가 초음파 화면을 보더니 ‘아기가 하나 더 있는 것 같다’고 하는 거 아닌가. 지하 단칸방에서 아들 셋 키우는데 쌍둥이라니, 임신 6개월이면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나. 펑펑 울면서 집에 왔다. 남편도 소식을 듣더니 주저앉았다. 가족도 사회도 반대하는 아이들을 낳게 되다니… 절실한 마음에 근처 성당을 찾았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집값이 싼 인천으로 이사했다. 알뜰하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하니 행복했다. 아들 셋 낳고 본 쌍둥이 딸들이 축복이었다. 순한 여자애들이라 힘들지는 않았다. 여섯째가 생긴 것은 쌍둥이 딸들이 엄마 손에서 겨우 놓여나던 세 살 무렵이었다. 남편조차 10만 원권 수표 한 장 던져주고 낳지 말라고 가출을 해버렸을 정도였다. 여섯째는 이처럼 태어날 때 제일 반대가 심했던 아이였다. 이웃조차도 ‘돈 빌려줄 테니 낙태해라’고 할 정도였다.

왜 그렇게 반대하는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느냐고? 나는 엄마니까.

원치 않는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를 포기할 이유는 많다. 하지만 엄마만이 아이를 지킬 수 있다. 엄마만 변치 않고 잘 버티면 주변 사람들은 엄마를 따르게 된다. 이혼하자며 가출했던 남편은 두 달 만에 돌아왔다. 여섯째를 낳고 집에 왔을 때 남편이 장미 여섯 송이를 사들고 왔다. 결국 아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3년 뒤에 막내를 낳았다.

아이들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남편은 겨울철, 장마철에는 쉴 수밖에 없었다. 생활비가 부족했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면서 나는 어린이집 취사원 보조일을 하고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정식으로 취사원이 돼서 수입을 갖게 돼 뿌듯하다. 현재 큰아이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고 둘은 대학에 다닌다. 다른 아이들은 중고교생인데 다들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 그 힘든 세월을 살면서도, 그 많은 아이를 키워오면서도 나는 흔들림이 없었다. 힘들면 버텨내고 이겨내는 게 엄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살아온 모습, 내 아이들이 잘 자란 모습이 그 증거다.

장애를 이기게 해준 아이들
● 구두수선공 강석란 (60·충남 서산시)


나는 어렸을 적에 ‘호랑이 얼굴 같다’고 놀림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어릴 때 입은 화상 때문이었다. 언니와 공부하려고 등잔에 석유를 따르다 온 몸이 불에 탔다. 아랫입술과 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왼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어져 나갔다. 2년 만에 학교를 갔는데, 돌팔매질과 나뭇가지 매질이 날아왔다. 아이들이 내 얼굴을 놀리면서 괴롭혔다.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스물다섯 살에 결혼했다. 남편은 척추를 다친 장애인이었고 도로변에서 구두를 닦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두 아이를 낳고 행복했다. 가정환경과 부모의 장애로 그늘질 수도 있는 아이들이 명랑하게 자라나 주는 게 제일 감사했다. 어느 날 아이들과 시장에 다녀오는데 길에서 꼬마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놀렸다. 딸이 “우리 엄마도 옛날엔 예뻤어”라고 소리 질렀다. 내 흉터 때문에 아이들이 멸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피부이식수술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수술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꿈도 안 꿨던 수술이었다.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서 고민했다. 내 장애가 아이들에게 마음의 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병원 문을 두드렸다.

1년에 걸쳐 이식 수술을 세 번 받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허벅지와 배에서 살을 떼어내 목과 턱, 입술을 만들었다. 떼 놓은 곳이 붙인 곳보다 더 아팠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생각에 참고 견뎠다. 지금은 립스틱 바르고 화장하면 남들 보기에 화상 입은 것도 잘 모를 정도다.

그 사이 시련이 닥쳤다. 남편이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다른 일은 안하고 남편의 구두 수선만 도운지라 할 수 있는 일은 구두 수선뿐이었다. 처음엔 기술이 부족해서 손님에게 원성도 많이 샀다. 바늘로 신발을 꿰매다가 내 손가락을 꿰매 버려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부모에게 장애가 있고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사실을 숨기고 싶은 아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부모의 장애와 직업을 늘 떳떳하게 밝히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다. 한 손님이 음료수를 갖고 들어왔다. 나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 손님은 “제가 따님의 담임선생님입니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딸아이가 너무 밝고 활기차고 똑똑해서 선생님은 놀라움과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선생님께 음료수를 드릴 텐데, 나는 딸 덕분에 선생님께 음료수를 받아본 어머니가 됐다.

나는 왼손을 쓰지 못해서 한 손으로 일한다. 구두 수선이 더럽고 힘든 일이라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엄마라서 할 수 있다. 구둣가게에 가족사진과 함께 ‘하나님, 가정, 구두’라고 적은 글을 액자에 담아 걸어 놨다. 힘들 때 그걸 보면 힘이 난다. 난 아무것도 없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우리 가정은 종합선물세트”
● 버려진 아이들 품은 양정숙 (45·경기 화성시)


한부모 가정, 입양, 장애…. 세상은 우리 가정을 ‘종합선물세트’라고 부른다. 나는 아빠 없이 혼자 아이들을 키운다. 7명의 아이 중 6명을 맡아 키웠다. 이 중에서 내가 낳은 아이는 한 명이다. 나머지는 위탁 결연해 양육했던 아이도 있고 정식 입양한 아이도 있다. 그중 열여섯 살 세진이는 장애아였다.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건 10대 때부터였다. 아버지가 시켜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는데 알코올 의존증 환자 아이들, 엄마가 공장에서 일하느라 방치된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연탄 살 돈이 없어서 추운 겨울에 집에서 떨고 있었다. 따뜻한 방에서 침대에 누워 자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 아이들과 내가 가진 것을 나누겠다고, 엄마에게 방치되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으로 위탁 양육했던 사내아이는 지하상가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데려갔더니 무연고자라고 했다. 아동복지시설에 데려다 놓으면 탈출하고, 또 데려다 놓으면 탈출하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그 아이한테 같이 살자고, 다만 날마다 집에 들어오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 아이가 지금 서른세 살이다. 대기업에 다닌다. 밥 지어 먹이고, 고등학교 갈 때까지 들어가는 돈도 다 내가 댔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다 눈에 밟힌 아이인데 왜 그런 아이에게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였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엄마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면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말이다.

세진이를 만난 건 자원봉사하던 보육원에서였다. 갓 돌이 된 아이였는데 선천성 사지 무형성 장애 때문에 오른쪽 무릎 아랫부분, 왼쪽 발목 부분이 없었다. 왜 장애아를 입양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이렇게 답했다. 엄마가 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느냐고. 그 아이가 2009년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에 올랐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아이의 재활치료를 위해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게 이런 결실을 봤다. 하루는 세진이가 엄마가 죽으면 자기는 외톨이라고 울었다. 그러자 친딸 은아가 세진이를 다독였다. “세진아, 너랑 나는 모두 엄마 가슴속이 고향이야”라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대리운전, 세차장 아르바이트, 베이비시터 등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지금도 대리운전을 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여자라고 무시하고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 20대 남자 손님이 내 머리채를 잡아끌며 술주정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는 내 모습을 의아해한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 엄마니까 강하다. 엄마니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예쁘고 뿌듯할 수가 없다. ‘너희들이 나를 엄마라고 불러줘서 감사하다’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아이들이 유명하다고,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엄마라서 사랑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목지선 인턴기자 성신여대 영문과 졸
#엄마#자녀#가족#한부모 가정#입양#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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