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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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채널A 정치부장
정용관 채널A 정치부장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겁니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죠.”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를 척살한 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단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신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셨지요. 성공했다면 제 목은 떨어졌을 겁니다”라고 윽박지르며….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단종과 29세 김정은, 단종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과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의 성격은 다르지만, 순전히 ‘권력투쟁’의 관점에서만 보면 1453년 10월 조선왕조의 두 사람과 2013년 12월 북한왕조의 두 사람의 운명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석탄 이권 다툼’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국가정보원 분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수양대군이 먼저 ‘호랑이(김종서) 사냥’에 나섰던 것처럼 장성택이 선수를 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북한의 주장대로 장성택이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찬탈할 야망 밑에 갖은 모략과 비열한 수법으로 국가 전복 음모의 극악한 범죄를 감행한’ 천하의 만고역적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랬다면 북한은 지금쯤 장성택의 세상이 돼 있을 것인가. 하긴, 장성택이 쿠데타에 성공했다 한들 본질적으로 북한 사회가 달라질 건 없다. 생전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장성택에 대해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이끌기에 가장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고는 하나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의 속성과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으로 미뤄 볼 때 오히려 혼돈으로 치닫고 있을 게 분명하다.

북한의 암울한 현실을 보노라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절로 떠오른다. 북한만큼 조지 오웰이 예고한 디스토피아에 딱 들어맞는 나라가 과연 있을까 싶다. ‘1984’를 탈고한 1948년에 북한이라는 정권이 탄생한 건 오웰도 감지하지 못한 운명의 장난일 수도 있다. 북한의 장성택 흔적 지우기를 보라. 사진에서, 글에서, 영상에서 장성택은 철저히 사라지고 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진리부’에 근무하며 당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록들을 ‘기억구멍’ 속에 넣어 없애 버리는 일을 했던 것처럼 북한의 누군가는 노동신문의 웹사이트나 대외 선전용 인터넷 홈페이지인 ‘우리민족끼리’,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등에서 장성택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있다. 북한 대학생들이 ‘역적’ 장성택을 성토하는 대회를 열고 있는 사진에선 특정 대상을 향해 집단 광기를 보이도록 하는 소설 속 ‘2분 증오의 시간’이 오버랩된다.

‘1984’의 마지막 문장은 소름을 돋게 한다.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했다.” 한때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강요하는 당의 명령에 일말의 의심을 품고 저항을 꿈꿨던 주인공 윈스턴은 전기 고문과 쥐 고문, 집요한 세뇌 끝에 완벽하게 바뀐다. 그는 총알이 자신의 머리통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불필요한 오해를 갖고 빅 브러더의 사랑이 넘치는 품을 떠나려 했던 스스로를 책망하며 눈물을 흘린다.

장성택 지우기를 하고 있을 북한의 ‘윈스턴’도 소설 속 윈스턴과 똑같은 길을 걸을까. 모든 주민으로 하여금 ‘뜨뜻미지근한 복종’이나 ‘비겁한 굴복’이 아니라 ‘자발적 굴종’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

‘1984’의 결론은 우울하지만,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왕조 독재 정권’인 북한이라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김정은은 빅 브러더가 아니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 아니라 넷이다. 수많은 북한의 윈스턴이 “나는 김씨 왕조를 증오한다”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것만 같다.

정용관 채널A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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