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심층 포커스]태국 정국불안의 핵, 탁신 前총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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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영웅” vs “대중 영합”… 태국 13년째 贊탁-反탁 싸움


‘친(親)정부 시위에도, 반(反)정부 시위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2006년 실각했지만 측근과 여동생을 내세워 7년째 태국 내정에 입김을 넣고 있는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64)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하늘과 땅만큼 격차가 크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민생(民生)을 중시한 ‘국부(國父)급 지도자’로 부르고 그를 미워하는 이들은 서슴없이 ‘부패한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라고 말한다.

사업가 출신의 탁신은 군부가 통치해 온 태국 정계의 이단아다. 그는 경제 성장과 친(親)서민을 표방한 정책 ‘탁시노믹스(Thaksinomics)’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부정부패로 집권과 실각을 거듭하며 극적인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지금 태국의 정정 불안도 그의 그림자 통치 때문이다. 부패 혐의로 해외 도피한 탁신의 사면을 놓고 친탁신파 ‘레드 셔츠’와 반탁신파 ‘옐로 셔츠’가 유혈 충돌을 벌이고 있다. 레드 셔츠는 농민·도시 빈민·태국 북부 거주자들이, 옐로 셔츠는 부유층·도시 엘리트·태국 중남부 거주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각각 ‘프롤레타리아(레드)’와 ‘왕(옐로)’을 의미하는 색깔을 택해 이 이름이 붙었다.

‘색깔 전쟁’으로도 불리는 양측의 대립은 7년째 태국을 뒤흔들며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는 신(神)’으로 추앙받으며 정치 격변기마다 중재자 역할을 한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86)의 권위도 고령과 불투명한 후계 구도로 예전만 못하다.

상당수 한국인에겐 휴양지에 불과하지만 태국은 서구 열강이 점령하지 못한 보기 드문 아시아 국가다. 넓은 국토와 풍부한 자원도 있다. 하지만 오랜 정쟁(政爭)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89위(2012년 기준 5850달러)인 저개발 국가의 덫에 걸려 있다. 태국이 탁신으로 인한 분열을 봉합하고 도약할 수 있을까.
경찰에서 최고 재벌로

탁신은 1949년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화교(華僑) 후손으로 태어났다. 중국 광둥(廣東) 출신인 그의 증조부는 19세기 후반 태국으로 이주했다. 부유한 비단 판매상이었던 탁신의 부친은 아들의 출세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했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후 태국 사회는 군부 경찰 관료가 번갈아 가며 지배했다. 야심만만한 태국 젊은이들은 군인이나 경찰을 꿈꿨다. 탁신도 그랬다. 1973년 경찰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미 이스턴켄터키대와 휴스턴주립대에서 형사 행정으로 각각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찰로 일하던 탁신은 1980년대 초 부업으로 컴퓨터를 정부기관에 임대하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동물적인 사업 감각 덕에 결과는 대박이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탁신은 1987년 경찰을 관두고 사업가로 나섰다. 탁신은 비퍼(삐삐), 케이블TV, 이동통신 등 각종 통신사업에도 손대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1990년대 초 탁신이 소유했던 ‘친 그룹’은 태국 굴지의 재벌로 부상했다.

탁신은 경찰 간부의 딸인 포자만 나폼베지라와 결혼해 1남 2녀를 뒀다. 이재(理財)에 밝은 포자만은 조그만 사업을 하던 탁신을 태국 최고 재벌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남편의 집권 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태국의 힐러리 클린턴’으로 불렸다. 탁신은 “내 정치자금은 아내의 지갑에서 나온다. 주요 의사 결정도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재계의 실력자로 만족할 수 없었던 탁신은 1994년 외교장관으로 공직에 입문한다. 청백리(淸白吏)의 표본이자 수차례의 내한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참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이 탁신의 과감한 추진력에 반해 그를 장관으로 천거했다. 정치적 사제(師弟) 관계인 둘은 두터운 친분을 과시했다. 하지만 탁신이 총리가 된 후 참롱이 그를 비판하며 사임을 요구하자 완전히 갈라섰다.
대중의 영웅과 부패 정치인 사이

탁신은 1998년 7월 ‘타이락타이(TRT)’ 당을 세워 정치인으로 본격 변신했다. 아시아 외환위기로 당시 태국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경제난에 지친 태국인들은 보수 성향에 부유층 일색인 민주당 정권을 불신했다. 자신은 재벌이었지만 탁신은 집권을 위해 반드시 저소득층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탁신은 30밧(약 980원) 의료제, 농가부채 탕감 등 친서민 정책을 속속 내놓았다. 경영자 출신답게 TRT 당원을 모집할 때도 다단계 판매 방식을 적용해 빠르게 머릿수를 늘렸다. TRT는 창당 3년 만인 2001년 1월 총선에서 하원 500석 중 248석을 석권해 제1당으로 떠올랐다. 총선 한 달 만에 탁신은 총리로 직행했다.

6700만 명의 태국 인구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은 탁신 집권 전 병원을 거의 이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30밧 의료제 덕에 서민도 의료 혜택을 누릴 길이 열렸다. 탁신은 서민층의 학자금 융자를 지원했고 농촌 한 마을당 한 명씩 국비 장학생을 선발해 해외 유학도 보냈다. 지금도 대학생이 특권 계층인 태국에서 서민에게 고등교육의 물꼬를 터준 일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저소득층은 탁시노믹스에 열광했다. 외환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난 태국 경제도 5∼6%를 넘나드는 고성장 가도를 달렸다.

그럴수록 군부 관료 부유층 등 탁신 반대파의 결집도 두드러졌다. 특히 8명에 달하는 그의 형제자매에다 처가 식구까지 가세해 태국의 기간사업을 사실상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게 문제였다. 반 탁신 언론 및 시민단체를 거세게 탄압하는 그의 권위적인 통치 성향도 비판을 키웠다.

200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탁신은 농민 금고 확대, 값싼 주택 공급 등 더 파격적인 공약을 내놨다. 이에 TRT는 총선에서 4년 전보다 129석이나 많은 377석을 차지했다. 재집권에 성공한 탁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종신 집권이 가능하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2006년 1월 탁신 일가는 친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친 코퍼레이션’의 주식 49.6%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에 팔았다. 약 20억 달러(약 2조1200억 원)의 막대한 차익을 얻고도 한 푼의 세금도 안 낸 사실이 드러나자 민심이 등을 돌렸다. “사리사욕을 위해 태국의 국부(國富)를 외국에 넘겼다” “최고경영자(CEO)형 총리라더니 자신이 왕인 줄 안다”는 비판이 거셌다.

탁신 퇴진운동 단체이자 ‘옐로 셔츠’의 전신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바로 이때 출범했다. 이들은 왕실의 상징색인 노란 옷을 입고 반탁신 시위를 벌였다. 왕실모독법이 존재하는 태국에서 왕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이다. 탁신이 공화제 도입 주장 등 종종 왕실의 권위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점도 반대파를 자극했다.

탁신은 의회를 해산했다. 2006년 4월 선거에서 TRT는 또 승리했다. 하지만 PAD는 부정 선거라며 반발했고 헌법재판소도 총선 무효를 선언했다. 탁신은 외교로 내치 문제를 누그러뜨리겠다는 생각에 같은 해 9월 미국 뉴욕의 유엔 총회에 참석했다. 이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각한 탁신은 영국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탁신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2007년 12월 총선에서 탁신 측근들이 만든 ‘국민의 힘(PPP)’ 당이 승리했다. 그는 2008년 2월 지지자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했다. 그러나 부정부패 관련 소송이 잇따르고 자신의 유죄 판결이 확실시되자 2008년 8월 두 번째 해외 도피를 택했다. 이후 그는 두바이, 홍콩, 유럽 등을 오가며 살고 있다. 부인과도 이혼했다. 일각에선 재산 보호를 위한 ‘무늬만 이혼’으로 본다.
색깔 전쟁과 그림자 통치

잉락 친나왓
잉락 친나왓
탁신이 도피한 지 4개월 후 ‘반 탁신’을 기치로 내건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 대표가 총리로 취임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서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레드 셔츠’의 전신인 ‘독재반대 민주연합전선(UDD)’과 탁신 향수에 시달리던 빈민층이 빨간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2009년부터 심심찮게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레드 셔츠’는 2010년 3월부터 5월까지 두 달간 수도 방콕 한복판에서 군대와 총격전으로 맞서는 사실상 내전을 벌였다. 태국 현대사의 최악의 유혈사태인 이 시위로 무려 90여 명이 숨졌다.

2011년 7월 총선에서 탁신은 정치 경험이 전무한 막내 여동생 잉락 친나왓을 내세웠다. 잉락은 빼어난 미모와 세련된 매너를 앞세워 자신의 프아타이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다. 탁신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잉락은 내 후계자가 아니라 복제 인간”이라며 통치에 관여할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실제 잉락은 오빠의 후광(後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잉락 내각의 관료 및 프아타이당 의원 100여 명은 올해 7월 생일을 맞은 탁신에게 ‘하례’를 드리려고 홍콩까지 가는 촌극을 벌였다. 이 와중에 줄곧 탁신의 사면을 추진하던 잉락이 11월 초 사면법을 통과시키자 야권의 분노는 거리에서 폭발했다. 11월 내내 충돌하던 양측의 대립은 12월 들어 유혈 사태로 번졌다. 결국 2010년 초에 이어 또 색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번 사태는 국제 문제로 번질 소지도 있다. 2011년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은 정국 장악을 위해 반탁신파인 군부와 ‘옐로 셔츠’가 배후 조종했다는 설이 파다하다.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탁신이 2005년 태국 남부의 무슬림 시위를 무력 진압했기에, 미얀마 군부는 태국 군부와 밀접한 관계여서 탁신 일가의 집권에 내심 부정적이다. 동남아 정치가 요동칠 가능성도 농후한 셈이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태국#탁신 총리#잉락 친나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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