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재명]킹 메이커 JP의 기념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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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후 16대 대선을 제외하고 모두 그의 지지를 받은 후보가 당선됐다. 1992년에는 김영삼(YS) 후보가, 5년 뒤에는 김대중(DJ) 후보가 대권을 잡았다. 1997년 대선을 1년여 남긴 DJ의 선택은 ‘유신 본당’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의 연대였다. JP는 DJ의 애를 태우다가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DJP연합에 서명했다. 이명박(MB) 박근혜 후보가 치열하게 경쟁한 2007년에는 MB의 손을, 지난해 대선에선 박 후보의 손을 들어줬으니 ‘미다스의 손’이라고 해야 하나.

▷딱 한 사람,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지지를 약속한 JP와 끝내 만나지 않았다. 측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당시 막후 조율에 나섰던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역사가 순간적으로 바뀌었다”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국무총리를 2번 지낸 역대 최다선 의원(9선). 누구보다 화려한 정치 역정을 걸었지만 배신의 상처도 컸다. YS 집권 때는 사실상 당에서 쫓겨났고, DJ와의 내각제 개헌 약속은 휴지조각이 됐다. JP는 2011년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 “정치는 속이 텅 빈 허업(虛業)”이라고도 토로했다.

▷JP 기념관 건립 사업이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충남 부여군은 2010년 군비 3억1500만 원을 들여 1300m² 규모의 기념관 건립 터를 사들였다. 문제는 건물을 올리는 데 필요한 65억 원. 부여군은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대통령을 지내지 못한 ‘영원한 2인자’의 서글픔이랄까.

▷JP의 아호를 딴 ‘운정회(雲庭會)’가 10일 출범했다. 산업화 시대 JP의 공로를 기리자며 충청권 인사들이 뭉쳤다. 산업화 시대의 재조명뿐 아니라 ‘충청의 힘’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담겨 있으리라. 호남 인구를 넘어선 충청은 그에 걸맞은 대접을 요구하고 있다. 독자적으로 권력을 창출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정부에 손만 벌리지 말고 지역 출신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모금해 JP 기념관 건립에 보탠다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재명 논설위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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