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쏘폭’ 斷想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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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정한 비율대로 잔을 채운 뒤 티슈로 덮개를 만들어 씌운다. 손목을 이용해 획 돌리면 잔 안에 ‘미니 허리케인’이 만들어진다. 티슈가 젖어도 걱정하지 마라. 한국인들이 하듯 젖은 티슈를 천장에 던져 붙일 수도 있다.”

최근 프리랜서 작가 노먼 밀러 씨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 온라인판에 ‘소주,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이라는 글을 통해 소주 폭탄주 중 ‘회오리주’ 제조법을 소개했다. 이보다 며칠 앞서 미국 CNN은 ‘한국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하는 10가지’를 꼽으면서 높은 인터넷 보급률, 스마트폰 이용률 등과 함께 ‘폭탄주가 오가는 회식문화’를 포함시켰다.

이렇게 해외 언론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폭탄주는 맛과 재미를 겸비한 음주문화다. 외국에 체류해본 사람이라면 술자리에서 외국어가 달릴 때 폭탄주를 마는 것처럼 효과적인 소통수단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이런 폭탄주 문화는 한류(韓流) 스타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고 있다.

‘강남 스타일’ ‘젠틀맨’의 잇따른 인기로 국제스타가 된 가수 싸이는 올해 초 하이트진로 모델로 나서 소주폭탄 제조법이 담긴 코믹 동영상들을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유포했다. LA 다저스의 류현진 선수 역시 LA 한인타운에서 동료 선수들과 갈비파티를 하며 밥상 위에 소주와 맥주를 나란히 올린 사진을 찍어 소폭 마니아임을 입증했다. 영화 ‘지. 아이. 조’ 등을 통해 할리우드 액션스타로 떠오른 이병헌 씨도 “함께 일한 감독과 배우들에게 폭탄주를 전수했다”고 자랑했다.

이쯤 되면 한국 드라마, 아이돌 그룹의 뒤를 이을 유력한 차세대 한류 후보로 폭탄주 문화를 꼽을 만하다. 특히 둘 다 외국 술인 위스키와 맥주를 섞는 ‘양폭’과 달리 소주와 맥주를 탄 소폭은 전통과 외래문화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시대의 총아로 손색이 없다. 소주와 맥주라는 대중주를 섞어 부가가치가 높은 술을 만들어 마신다는 점 때문에 ‘소폭이야말로 창조경제의 정수’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소폭 혹은 소맥의 연원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로 짐작된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주머니가 얄팍해진 직장인들이 소폭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급속도로 확산된 건 2000년대 중반이다. 가장 큰 계기는 노무현 정부가 집권 2년차였던 2004년에 도입한 ‘접대비 실명제’. 기업이 50만 원 이상의 접대비를 쓸 때 상세한 명세를 적어 내도록 한 이 제도 때문에 비싼 양주를 마시기 부담스러워진 사람들이 양폭의 대체재로 소폭을 선택했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치인, 고위 관료와 화합을 위해 공개적으로 마신 술은 언제나 소폭이었다. 그렇다 보니 정치인, 관료 사이에서 소폭은 안전한 술자리의 가이드라인이 됐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소폭은 지위의 고하, 재산의 다과를 막론하고 한국인의 표준 주종으로 자리 잡았다. 양주 파는 술집에 가서 “다른 걸 마시면 다음 날이 힘들다”며 양주 값을 내고 소주를 주문해 소폭을 만들어 마시는 부자도 여럿 봤다. 이렇게 평등하게 사랑받는 술이 세계적으로 또 있을까 싶다.

‘좌우 합작’으로 한국의 소폭 문화를 일궈낸 두 정부의 후예, 여야는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다 되도록 조금도 화해할 기미가 없다. 모든 갈등을 접고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이 소폭을 돌리며 ‘러브샷’ 하는 모습을 연말에 볼 수는 없을까. 북한 숙청사태, 방공식별구역 분쟁 등으로 대외환경이 위태로운데도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정치권의 행태가 너무 답답해 한번 해본 생각이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폭탄주#정치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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