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명]민주화 이후, 그 두려움의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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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논설위원
이재명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초 러시아 통신사 기자가 ‘권력은 어떤 느낌이냐’고 묻자 “권력의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역으로 권력은 많은 사람에게 짜증을 주기도 한다.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두고 벌어진 여야의 공방이 그랬다. 서로를 향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한 악담 말이다.

한국의 정치판은 아프리카 초원 같다. 매일 아침 톰슨가젤(작은 영양)은 깨어난다. 가젤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사자는 가장 느린 가젤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사자냐, 가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해가 뜨면 그저 달려야 한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세계는 평평하다’에 나오는 얘기다.

박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는 사자이자 가젤이다.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면 잡아먹힌다. 성난 민심이 등을 돌리면 굶어 죽는다. 먹고 먹히는 전쟁터에서 포용이나 타협은 사치다. 자신의 비전이 아닌 상대의 실패를 통해 선택받는 구조 속에서 한국 정치생태계는 그렇게 진화했다. 이 생태계를 지배하는 힘은 ‘밀리면 끝’이라는 두려움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격인 ‘운명이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청와대와 검찰, 보수언론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라고 조롱했다.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모욕하고 저주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지금 MB도 노 전 대통령의 두려움에 공감할 것이다. 누가 조롱하느냐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부정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집권 마지막 해 신년 화두로 ‘임사이구(臨事而懼·큰일을 당하면 두려운 마음으로 지혜를 모아 일을 성사시킨다)’를 택한 것은 나름의 예견이었을까.

박 대통령에게서도 전직들의 두려움이 어른거린다. 지나친 신중함과 원칙에 대한 집착이 그렇다. 집권 7개월이 되도록 인사는 여전히 길을 헤매고, 현실성 없는 공약을 지키겠다며 관료들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권이 한결같이 실패한 데 대한 두려움, 자신도 언젠가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더 경직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회담할 때 의제를 정하지 않고 모든 내용을 공개한 것을 ‘국정의 투명성’으로 포장했지만 사실 야당의 술수에 말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MB와 40분간 회담한 뒤 “국정 전반에 대해 얘기했다”며 달랑 여섯 문장만 공개했다. 당시 회담의 주도권을 쥔 쪽은 박 당선인이었고 이번에는 김 대표라는 차이가 공개와 비공개를 가른 셈이다.

김 대표의 두려움은 더 현실적이다. 그는 이달 초 서울 여의도의 새 당사에 입주하며 “지난 10년 동안 당 대표와 지도부가 무려 26번이나 바뀌었고 그 와중에 아주 고약한 계파주의가 고개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싸움에서 밀리면 민주당은 주저 없이 27번째 지도부를 세울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그다지 낙관하지 않았다. “기존 정치 세력들 사이의 분화와 재편을 통해 협소한 엘리트 구성 내부에서 권력이 폐쇄적으로 순환되는 구조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사자와 가젤의 생존경쟁 속에 두려움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란 얘기다.

홍정욱 전 의원은 1년여 전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두려움은 타고나기에 절로 죽지 않고, 자신감은 타고나지 않기에 절로 솟지 않는다.” 절로 죽지 않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정치생태계에서 국민행복, 민생정치는 요원하다.

이재명 논설위원 egija@donga.com
#박근혜 대통령#정치판#권력#민주화#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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