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개혁 외치다가 집권뒤엔 흐지부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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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야 바뀔 때마다 攻守만 교체

“국가정보원을 폐지하고 대신 해외정보처 설립을 추진한다. 신설되는 해외정보처는 수사권 없이 대북정보기능과 대테러 및 해외 정보수집 기능만 갖게 된다. 9월 정기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제출하겠다.”

민주당의 주장이 아니다. 2003년 5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국정원 폐지 및 해외정보처 추진 기획단’의 회의 결과다. 앞서 한나라당은 그해 4월 30일 의원총회를 통해 ‘국정원 폐지 및 해외정보처 추진’을 의결한 뒤 당내에 추진기획단을 설립했다.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국정원이 불법도청 등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고영구 국정원장과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을 강행하자 ‘국정원 폐지 및 국정원장 사퇴’를 강력히 요구했다. 청와대의 반대 등으로 성사되진 않았지만 한나라당은 △국정원 수사권 폐지 △국정원의 해외정보수집 기능 강화 및 명칭 변경 △국정원에 대한 국회의 예산통제권 강화 등을 주장했다.

2013년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정원 개혁을 둘러싼 여야의 논쟁은 10년 전 국회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 국정원이 개입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사퇴해야 한다” 등을 주장하고 있다. 개혁안의 내용은 10년 전 한나라당의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 공격과 방어의 포지션만 바뀌었을 뿐 여당과 청와대의 ‘신중론’ 속에 야당의 ‘국정원 폐지 또는 축소’ ‘국정원장 사퇴’ 주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8일 수유동 4·19 민주묘지를 찾은 뒤 거듭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대통령과의 만남은 국정원 전면개혁 실현의 수단이지, 만남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라며 “국정원 얘기를 놔두고 민생만 얘기하자는 것은 ‘여우와 두루미’ 얘기와 비슷하다. 본질을 직시 못 한 엉뚱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 개혁을 둘러싸고 반복되는 여야의 논쟁은 정치권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역대 정권은 대통령 측근이나 심복을 국정원장을 비롯해 주요 보직에 임명해 정보를 장악하고 때로는 이를 통해 야당을 압박했다. 결국 집권세력의 성격과 무관하게 국정원은 늘 여당엔 필요한 존재로, 야당엔 부담스러운 존재로 작용했다는 뜻이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과 정치쇄신특위 위원을 지낸 이상돈 전 중앙대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과거 정권은 집권 전엔 국정원 개혁을 주장하다가도 집권 후 자신들에게 편리한 게 있으니까 개혁을 흐지부지 넘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도 “여야 모두 과거 국정원을 정권 장악과 국내 정치에 활용한 것이 명백한 사실인데도 마치 서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결국 대통령과 참모들이 국정원 개혁에 대해 어떤 식견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대공 수사뿐 아니라 국내 정치를 위해 만들어진 역사가 있는 만큼 국정원의 수사권을 폐지하고, 미국의 FBI처럼 검찰과 경찰의 공안수사 기능과 결합한 새로운 중앙수사국을 꾸리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국가정보원#국정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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