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 대구 여대생 의문사… 끈질긴 父情이 범인 잡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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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3명에 몹쓸짓 당한 뒤 고속도로 헤매다 차에 치여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1998년 대구 구마고속도로 여대생 사망사건의 범인이 15년 만에 붙잡혔다. 당시 피해 여성은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고속도로를 정신없이 건너려다 트럭에 치여 숨진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경찰은 당초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사로 처리하려 했으나 딸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무고한 여대생을 죽음으로 내몬 천인공노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대구지방검찰청 형사1부는 5일 여대생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특수강도 강간)로 스리랑카인 K 씨(46)를 구속 기소하고 스리랑카에 머물고 있는 44세, 39세 공범 2명을 기소 중지했다고 밝혔다.

산업연수생이었던 이들은 1998년 10월 17일 새벽 대구 달서구의 한 대학가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던 정모 씨(당시 18세·대학 1학년)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인근 구마고속도로 굴다리로 끌고 가 차례로 번갈아가며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K 씨 등은 성폭행 후에 정 씨의 현금과 학생증을 빼앗고 그대로 달아났다. 충격을 받은 정 씨는 고속도로를 건너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도움을 청하려고 가다가 23t 트럭에 치여 숨진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당시 경찰은 정 씨의 시신에 속옷이 벗겨져 있는 등 성범죄 정황이 있는데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해 유족들의 반발을 샀다. 경찰은 정 씨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트럭에 치인 것이란 부검 결과에만 의존해 성폭행 사건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이후 속옷에서 나온 정액을 토대로 주변 인물 수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한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유족은 지금까지 청와대와 법무부 등에 수차례 교통사고 운전자를 상대로 강간 살인 혐의로, 담당 경찰관을 직무 유기로 고소하고 진정서 등을 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나 각하 처분됐다.

K 씨 등은 대구 성서와 경북 경산 등의 섬유공장을 옮겨 다니며 태연히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말이 서툴렀던 이들은 정 씨가 사망한 사실도 몰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범 2명은 각각 2001년, 2005년에 불법 체류로 적발돼 스리랑카로 강제 출국당했다. K 씨는 2002년 4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대구에서 살았으며 자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스리랑카 식품점을 열어 운영 중이다.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던 이 사건은 K 씨가 2011년 11월 26일 여학생을 꾀어 성매매를 권유하다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입건돼 검찰이 유전자(DNA)를 채취하면서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올해 5월 유족이 대구지검에 다시 고소장을 제출하자 검찰이 뒤늦게 사건에 의문을 갖고 재수사에 나선 것. 결국 6월 초에 1998년 사건 때 유일한 증거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보관해오던 정 씨의 속옷에서 검출된 정액과 K 씨의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DNA 증거만으로는 부족했다. 3개월간 K 씨의 주변을 수사한 끝에 당시 산업연수생 동료들에게서 15년 전 성폭행에 대한 진술을 확보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공소시효는 원래 15년(올해 10월 16일)이었지만 2010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DNA가 확보된 성범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 연장된 25년으로 변경됐다. 또 검찰은 K 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올해 8월 20일 한 여성을 모텔로 유인해 성추행한 사실도 추가로 밝혀냈다. 이 밖에 K 씨의 휴대전화에서 여성의 사진 수백 장이 발견됨에 따라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검찰 관계자는 “한국과 스리랑카 사이에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지만 공범들에 대한 처벌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딸을 잃은 뒤 생업을 포기한 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모든 걸 바쳐온 정 씨의 아버지(66)는 5일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딸에게 진실을 꼭 밝혀내겠다고 한 약속을 뒤늦게 지켜서 다행”이라며 “이제 딸과 남은 가족 모두가 마음 편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대구=장영훈 기자 j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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