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식당 착한 이야기]서울 강남구 ‘뺑드빱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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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정직하게… 이름부터 ‘먹고 놀라지는 마! 빵’

푸르게 펼쳐진 우리 밀밭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는 착한빵집 ‘뺑드빱바’의 마스터 이호영 씨. 그의 빵집은 잘 익은 밀밭과 포근한 빵을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노란색이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푸르게 펼쳐진 우리 밀밭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는 착한빵집 ‘뺑드빱바’의 마스터 이호영 씨. 그의 빵집은 잘 익은 밀밭과 포근한 빵을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노란색이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오전 7시, 그 남자는 눈사람이 된다. 매일매일.

오전 3시의 밀가루는 4시간 뒤 예쁘게 자란 빵이 된다. 온 세상이 잠든 새벽에 그는 그렇게 혼자 빵을 키운다. 밀가루가 빵이 되려면 발효를 세 번 거쳐야 한다. 1차 발효, 중간 발효, 2차 발효. 발효에 필요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새벽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날그날 빵을 제대로 내놓을 수가 없다. 일을 마칠 때쯤 그는 뽀얀 밀가루를 덮어쓰고 있기 마련이다.

27일 오후 잘 익은 밀밭 같은 노란색 벽이 인상적인 착한 빵집 ‘뺑드빱바’(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문을 열었다. 친절한 직원보다 먼저 반겨주는 것은 깊고 구수한 향기다. 반사적으로 코가 씰룩인다. 여느 빵집에서는 맡을 수 없는 진짜 빵 냄새다. 왼편에 쌓인 유기농 밀가루 포대, 흰색 조리복의 제빵사들이 분주하게 작업하는 오른편 오픈 키친도, 갖가지 빵도 나중에야 눈에 들어왔다.

오후 2시에 두 번째 출근을 한 뺑드빱바의 마스터 이호영(47)은 이렇게 말한다.

“빵은 정직해요.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만들기만 하면 좋은 빵이 돼요. 반죽과 발효에 드는 시간, 온도, 습도를 잘 맞추는 거죠. 이런 조건을 잘 지켜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빵은 원래 슬로푸드인데 우리나라에서 패스트푸드가 됐어요. 이스트를 잔뜩 쓰거나 개량제를 첨가하면 금세 만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만족스럽고 떳떳하려면 타협하지 않아야 하니까요.”

뺑드빱바를 처음 열 때 여섯 살이던 외동딸 서윤이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됐다. 아빠가 만든 담백한 빵을 제일 좋아한다. 하지만 깜깜한 새벽에 빵집으로 향하는 아빠를 보면서 서윤이는 “빵 만드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직업으로는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가 빵과 마주한 것은 1989년 신사동에 있던 대한제과기술학원에서였다. 대학 입시에 미끄러지고 군대에 다녀온 뒤였다. 당시만 해도 프랜차이즈 빵집이 많지 않았다. 주변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익혀두면 쓸모가 있을 거라고 권유했다. 6개월 단기 과정으로 배우면서 그는 재밌기보다는 새롭다고 생각했다.

한 살 많은 학원 선배였던 윤성모(현 한국제과기술학교 교사)가 그에게 길잡이가 돼 줬다. 앞으로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제과제빵 전문점이 생겨날 거다, 대기업도 뛰어들 거다, 꼭 유학 가서 빵을 배워라…. 처음 들어선 길에서 그에게 미래를 보여준 이였다.

이호영은 유학을 가기 위한 ‘스펙’을 쌓기로 했다. 학원을 마치고 대한항공 케이터링센터에 취직했다. 낮에는 기내식 빵을 만들고 밤에는 경희호텔경영전문대(1997년 경희대에 단과대학으로 흡수) 조리과를 다니며 3년간 주경야독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직서를 낸 후 스물아홉 살에 일본 도쿄 일본과자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때만 해도 빵에는 관심이 없었다. 제과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300여 명 가운데 고교를 갓 졸업한 일본인이 대부분이고 대만인 2명, 한국인이 그를 포함해 2명이었다.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반말과 텃세에 시달리면서 과자를 만들었다.

1학년 막바지인 11월경, 재미없는 학교생활에서 벗어나려고 한국인 동기와 프랑스로 열흘간 여행을 떠났다. 리옹에서 묵은 호텔 앞에 작은 빵집이 있었다. 오전 6시 반부터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빵을 사갔다. 그 집 바게트가 이호영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줬다.

“긴 바게트를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어요. 이게 정말 바게트구나, 빵이구나.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면서 풍성한 밀 향기를 담고 있었어요. 군더더기 없는 맛에, 어떤 재료든 포용할 것 같은 하얀 도화지 같은 느낌. 일본 빵도 맛있는데 프랑스를 가니까 빵이 더 맛있는 거예요. 그때 진로를 확실하게 결정했어요. 빵을 해야겠다고.”

일본에 돌아와서 양과자 책을 다 버리고 빵을 다룬 책을 사기 시작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1999∼2001년 두 곳의 윈도 베이커리(개인 제과점)에서 일하다가 창업을 하기로 하고 그 준비 과정으로 리치몬드제과기술학원으로 옮겨 2007년까지 학생들에게 빵을 가르쳤다.

2007년 학원 학생과 공동투자 형태로 청담동에 빵집을 열었다. 하지만 인테리어부터 빵에 대한 접근방식까지 생각이 달랐다. 한 달 만에 나왔고 이듬해 1월 뺑드빱바를 열었다. 동업으로 빵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빵을 테스트하고 레시피를 갖춰 놓은 덕분에 그리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빵에 매달린 지 17년 만에 마련한 온전한 자신의 빵집.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번듯한 가게를 운영하던 동기들에 비하면 한참 뒤늦은 일이었다. 그는 빵집의 콘셉트를 ‘아빠가 만드는 빵’으로 하고 가게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느리지만 정직하게 빚어내는, 담백한 빵.

“빵 팔면서 아이스크림, 케이크, 샌드위치도 파는 그런 보통 빵집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로케(크로켓) 튀기거나 케이크 만드는 건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내가 만나본 기존 빵집 사장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자기가 만든 빵을 먹이지 않았어요. 재료나 위생 면에서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나는 우리 아이에게 즐겁게 먹이는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주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국에서 그런 빵집 여는 건 시기상조 아니냐?” “나도 그렇게 빵 만드는 거 좋은 거 아는데, 아직은 아니야.” “그 빵집 얼마나 가겠니.”

뺑드빱바의 빵은 꾸밈이 없다. 밥처럼 느껴지는 빵이다. 통밀식빵은 푸근한 밀의 향기를 담뿍 담고 있다. 단숨에 사로잡는 맛이 아니라 묵직한 덩어리 하나를 질리지 않고 끝까지 먹을 수 있는 그런 빵이다. 잼이나 햄, 버터, 치즈 어느 것이든 넉넉한 품으로 받아 안는 그런 빵이다.

빵 진열대를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달려라 베이컨, 같이 가 양파야’ ‘고소고소 아몬드 크루아상’ ‘순진한 치아바타(차바타)’ ‘먹고 놀라지는 마! 빵’…. “스토리텔링식 빵 이름의 효시일걸요.(웃음) 제품 이름은 재료나 모양, 맛의 특징을 반영해 직원들과 같이 지어요. 이름만 봐도 무슨 빵인지 알면 손님들이 더 쉽고 즐겁게 고르실 테니까요.”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빵집은 이제 직원이 10명으로 늘어났다. 건강한 빵이라는 입소문이 난 덕분이다. 지난해 5월 18일 채널A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뒤 그는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에 더 가까이 가게 됐다. 바로 ‘빵 만드는 농사꾼’이다. 착한식당에 선정되기 전에는 전남 구례의 협동조합에서 밀을 사다가 제분해서 썼다. 그는 뺑드빱바만의 밀밭에서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밀을 직접 길러 그 밀로 빵을 만들고 싶다. 그 중간단계에 그는 서 있다.

지난해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약 1만6500m²(약 5000평)의 밀밭을 계약 재배하기로 하고, 올해 6월 우리 밀 8t을 수확했다. 구례 창고에 보관된 밀은 일주일에 120kg씩 서울로 가져온다. 밀은 곡물선별기에서 지푸라기와 풀씨를 걸러내고, 돌을 제거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친 뒤 제분기로 갈아서 사용한다. 그의 명함 뒷면은 구례에서 수확한 밀 사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에는 자기만의 밀밭을 가진 빵집이 많단다. 밀 농가와 협업하면서 원하는 특성을 가진 밀을 생산하고 그 밀로 빵집의 색깔을 담은 빵을 만들어낸다. 국내에서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윈도 베이커리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농가마다 품종과 품질, 수확량이 천차만별이고 전체 물량 자체가 많지 않아 본격적으로 제빵에 사용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그는 밀농사를 직접 짓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구례 밀밭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없이 벅차오릅니다. 그곳에 서 있으면 나와 뺑드빱바의 미래가 영화처럼 펼쳐져 보이지요. 1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곳이니까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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