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잿빛 도시' vs '햇볕 도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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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경쟁력이 한국車산업의 미래다]<上> 파산한 디트로이트와 살아나는 美남부 ‘선벨트’

지난달 파산을 선언한 미국 디트로이트 시 곳곳에는 폐허가 된 건물들이 방치돼 있다. 멀리 옛 자동차 도시를 상징했던 캐딜락 타워가 보인다. 디트로이트=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지난달 파산을 선언한 미국 디트로이트 시 곳곳에는 폐허가 된 건물들이 방치돼 있다. 멀리 옛 자동차 도시를 상징했던 캐딜락 타워가 보인다. 디트로이트=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1. 거대한 도시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건물은 ‘구치소’가 거의 유일했다. 그나마 활력이 느껴지는 건 카지노 정도였다.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을 주도했던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시가 파산을 선언한 지 한 달 정도가 흐른 20일 오후(현지 시간). 시내는 대낮임에도 마치 ‘유령도시’ 같은 적막감이 흘렀다.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되던 건물들은 폐허가 된 채 방치돼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힘없이 거리를 거니는 이들과 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경찰관 정도가 눈에 띌 뿐이었다.

#2. 22일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1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웨스트포인트 시 기아자동차 공장. 활기 찬 직원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기계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공장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눈웃음을 건넸다. 또다시 50여 분을 이동해 도착한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 현대자동차 공장 인근에는 새로 지은 호텔들이 즐비했다. 한국인 주재 직원과 현지 직원들의 표정에서는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났다.

기업을 쫓아낸 도시와 기업을 불러들인 도시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미국 경제를 주도했던 ‘자동차 도시’의 흔적은 디트로이트 시 어디서도 쉽게 찾기 힘들었다. 반면 기업들이 몰려든 조지아 주와 앨라배마 주는 활력이 넘쳤다. 미국의 신 자동차 산업 단지, 이른바 ‘선벨트’가 구축된 남부는 파격적인 기업 유치 활동으로 10여 년 전부터 지역 경제가 살아나면서 인구도 늘고 있다. 국내에서 만성적인 파업에 시달리는 현대·기아차는 최근 조지아 공장 부근에 부품공장을 추가로 짓기로 했다.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는 노조의 경쟁력이 한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관련 내용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 “모두가 단기적 이익에만 몰두한 게 문제”


세계 자동차 산업을 이끌던 ‘모타운(MOTOWN)’ 디트로이트의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950년대 최대 호황기에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 강성 노조의 무리한 퇴직연금 요구를 기업이 수용했고, 이후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담이 커졌다. 1970년대 이후 미국 자동차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도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강성 노조를 피해 기업들이 떠났고, 범죄를 피해 중산층이 교외로 탈출했다. 한때 180만 명에 이르던 인구는 최근 7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강력범죄와 방화가 늘면서 경찰관과 소방관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복지 지출은 늘었지만 이를 지탱해줄 세수는 사라졌다. 결국 시는 파산을 선언했다. 훈 영 합굿 미시간 주 상원의원은 “시의 연기금 투자 실패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노조, 기업가, 시민 등 모두가 눈앞의 이익만 추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디트로이트 시내 모노레일에서 만난 크리스토퍼 커티스 씨는 “디트로이트 시민으로서 가장 걱정되는 건 나를 포함한 많은 이의 자산가치가 크게 하락할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제너럴모터스(GM)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한국인 교포 최모 씨(41)는 “최근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 ‘빅3’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지만 도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기 힘들어 보인다”고 전했다.

○ “노사 갈등 없고 생산성 향상에만 전념”


미국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른 앨라배마 주와 조지아 주는 주력 산업이었던 농업이 쇠퇴하면서 성장동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강성 노조 등을 피해 전통적 동북부 공업지대를 탈출하기 시작한 자동차 관련 기업들을 적극 유치하면서 부활했다. 닛산, 혼다 등 일본 업체와 현대차, 기아차 공장뿐만 아니라 각종 부품업체 등까지 몰려들었다. 이 기업들은 최근 1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직·간접적으로 10만여 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현대차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차와 기아차 현지 공장에서만 직접 고용한 인원이 6000여 명. 한국에서 진출한 29개 협력업체와 미국업체 76개사가 새로 고용한 인원은 1만 명에 이른다. 사람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서비스업과 유통업이 활성화됐고, 이로 인한 고용창출 효과까지 합치면 두 공장 덕에 생겨난 일자리는 3만 개가 넘는다. 앨라배마 주의 실업률은 10%대에서 7%대로 낮아졌고, 조지아 주의 실업률 역시 13%대에서 10%대로 하락했다. 인구는 매년 13%씩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이처럼 기업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지방정부의 각종 지원책은 파격적이고 풍부한 반면에 노조 자체가 없어 기업이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한국 공장의 파업으로 이곳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2교대를 3교대로 바꾸는 데 근로자들과 4개월 협의만 하면 될 정도였다”며 “울산 공장에서 3교대를 2교대로 바꾸기 위해 7년을 허비했던 것과 비교하면 경영환경이 천지차이”라고 말했다. 생산라인에 투입하는 차종 하나를 변경하는 데 울산 공장은 6개월이 걸리지만 미국에서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안정적 고용이 곧 복지’라고 생각하는 미국 근로자들은 합리적인 회사의 요청은 받아들이고 상황에 맞춰주는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상생’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기아차 관계자는 “한국 자동차 공장의 ‘편성효율’이 60%가 채 안 되는 데 비해 이곳의 편성효율은 90%가 넘는다”며 “한국 공장의 절반 정도 인원으로 같은 수의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 1달러 ‘기업천국’ ▼

미국 조지아 주 웨스트포인트 시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현지 생산직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곳 기아차 공장 한 곳에서만 현지 주민 3000여 명이 새로 일자리를 얻었다. 기아자동차 조지아 공장 제공
미국 조지아 주 웨스트포인트 시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현지 생산직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곳 기아차 공장 한 곳에서만 현지 주민 3000여 명이 새로 일자리를 얻었다. 기아자동차 조지아 공장 제공
1달러.

미국 앨라배마 주와 조지아 주의 기업 유치 전쟁을 상징하는 액수다. 미국에선 이제 ‘팁’으로 건네기도 쑥스러운 금액이지만 이 돈으로 현대자동차는 앨라배마 공장용지 717만 m²가량을 사들였다. 기아자동차 역시 단 1달러에 조지아 공장용지 893만 m²를 25년간 임차하기로 했다.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건 미국 남부 지방정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혜택을 기업들에 제공하고 있다. 2005년 문을 연 현대차 공장을 위해 앨라배마 주 정부는 공장 주변 도로 확충, 채용 광고비 지원, 연수원 건립 및 교육훈련 프로그램 지원 등을 약속했고 이를 모두 이행했다. 현대차 공장으로 들어서는 도로는 ‘현대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방정부에 내는 세금 외에 지방정부에는 아예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대차 공장의 번지수는 한국의 울산공장 번지수와 같은 ‘700번지’로 해주는 등 세심한 배려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곳 지방정부 관료나 정치인들은 ‘실업률 감소’와 ‘경제 활성화’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기업이 뭘 고민하는지 먼저 찾아보고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한다”고 설명했다.

2009년 문을 연 웨스트포인트 시 기아차 공장 역시 ‘천국 같은 기업 환경’에 감탄했다. 조지아 주 정부는 미국 대륙을 지나는 화물 철도 지선 하나를 아예 기아차 공장 내부에 건설해줬고, 앨라배마 주가 현대차에 지원해준 모든 혜택에 더해 비상시 사용 가능한 물탱크까지 지어주기도 했다. 기아차 관계자는 “한국에서 노조에 시달리고, 기업 규제에 시달리다가 이곳에 오면 말 그대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규제 걱정, 세금 부담 없이 유연성 높고 합리적인 근로자들과 협의해가며 생산성 향상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도 조지아 주 부지사가 공장을 방문해 기아차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불편한 점을 먼저 물어보고 갔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몽고메리·웨스트포인트=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디트로이트#선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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