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재형]쌀 개방, 더는 미룰 수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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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각국은 농산물에 대한 관세화(무역장벽을 없애는 대신 국제시장가격과 국내시장가격의 차이만큼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를 시행해 왔다.

우리의 경우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에 관세화를 시행했다. 쌀의 경우에는 10년간 관세화를 유예했고, 2004년에 10년간 재연장해 내년 말 종료를 앞두고 있다. 일각에서 다시 연장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동안 쌀 관세화를 미룬 것은 국내 쌀 시장 및 농가가 다 죽는다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관세화 재연장은 가능한 것인지, 재연장이 이뤄진다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없는지 엄밀하게 따져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관세화’는 각종 수입 규제를 철폐하는 대신 이에 상당하는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시장 개방과는 다르다. 각국은 WTO 합의에 따라 각국 사정에 맞게 농산물 관세를 매기고 있는데 쌀의 경우 국내가격과 국제가격 차이를 관세로 부과하되 정해진 관세율의 10%를 줄여야 한다. 우리는 쌀 관세율을 1986∼1988년을 기준연도로 해서 국내 및 국제가격을 계산해 정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 연구에 따르면 국내 쌀값은 수입 쌀값의 다섯 배인데 이 차이에서 10%를 줄이면 관세율은 360%가 된다. 예를 들어 국내산 쌀과 가장 유사한 미국산 중립종 가격이 100원이라면 관세 360원을 더해 수입가격은 460원이 된다. 현재 국제시장에서 우리 쌀은 미국산 중립종이 100원이라면 270원으로 비싸다. 하지만 쌀 관세율을 적용할 경우 미국 쌀(460원)은 국산 쌀(270원)보다 비싸진다. 따라서 외국 쌀이 수입되면 국내 쌀 시장이 다 죽는다는 우려는 적어도 가격 면에서는 없다고 보인다.

쌀 관세화를 미룬다고 쌀이 수입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WTO 규정에 따라 쌀 관세화를 미루면 이에 대한 대가로 의무적으로 할당량을 수입해야 하는데 이 양은 관세화 정책을 시행할 때까지 일정 비율로 매년 늘게 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 1995년 1%였던 수입량은 2004년 4%, 2014년에는 7.96%(약 41만 t)로 늘어난다. 수입 비용과 수입 쌀 1만 t당 연간 보관비용이 약 35억 원에 이르는데 이 엄청난 재정 부담을 감안하면 국민 혈세가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쌀 관세화를 재연장할 경우 의무수입량을 더 늘려야 한다. 의무수입 쌀의 경우 관세율이 5%로 낮아 오히려 국내 쌀보다 싸다. 이렇게 상당량의 쌀을 낮은 가격으로 앞으로도 매년 수입해야 한다면 다음 세대 농민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다.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쌀 수입을 미루고 있는 지금 방식이 과연 국익과 농민 이익에 부합하는지 매우 회의적이다.

WTO 농업협정은 쌀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기 위한 협상을 1회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재유예가 종료되는 시점에 관세화를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2004년에 한 번 연장했기 때문에 2015년부터는 관세화를 시행할 의무가 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 전 필리핀이 신청한 것과 같은 ‘관세화 의무면제’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WTO 회원국 동의가 필요하며 동의를 얻는다 해도 수출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의무수입 물량을 늘리거나 다른 상품의 관세를 내리는 등의 방식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필리핀도 의무면제 대가로 의무수입 물량을 상당 수준 늘리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이자 경제선진국인 우리에 대해 WTO 회원국이 의무면제에 동의할 가능성은 현재로서 매우 낮다. 쌀 관세화에 대한 몰이해, 농업에 대한 단기적 피해 우려, 농촌 표를 의식한 정치적 판단으로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불필요한 논란을 그만 거두고 유리한 방안을 마련할 때이다.

이재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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