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Harmony]야구에 미쳤다… 우리에게 나이란, 세대란 숫자일 뿐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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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아침야구회’의 나이를 잊은 사람들

부천 춘의야구장에서 야구 배트를 하나로 모은 부천아침야구회(부천시민야구협동조합) 사람들. 해도 뜨기 전인 이른 아침 6시부터 이들은 공을 던지고 때리며 그라운드를 달린다. 하루를 야구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야구란 나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황홀한 묘약과도 같다. 왼쪽부터 이선동, 정광호, 박홍식, 이수훈 씨. 부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부천 춘의야구장에서 야구 배트를 하나로 모은 부천아침야구회(부천시민야구협동조합) 사람들. 해도 뜨기 전인 이른 아침 6시부터 이들은 공을 던지고 때리며 그라운드를 달린다. 하루를 야구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야구란 나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황홀한 묘약과도 같다. 왼쪽부터 이선동, 정광호, 박홍식, 이수훈 씨. 부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야구 스타 이종범(현 한화 코치). 3년 전 유난히 무덥던 여름날. 당시 KIA에서 현역으로 뛰던 그에게 ‘야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5가지만 뽑아달라고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꼽은 5가지 순간은 모두 1993년과 1997년 사이에 몰려 있었다. ‘야구 천재’로 불리며 각종 개인 타이틀을 휩쓸고 팀의 우승을 이끌던 시절이었다.

1998년 일본으로 떠난 뒤 겪은 부상과 시련, 그리고 한국 복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일전 2차전에서 때린 결승타.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뒤 후배를 껴안고 펑펑 울던 모습. 좀 더 가까운 과거에 벌어졌던 극적인 장면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 5가지 순간을 통해 ‘부침 많았던 이종범의 야구 인생’을 보여주려는 게 질문의 의도였다. 예상을 빗나간 그의 대답은 결국 기사화되지 못했다. 혹자는 이 얘기를 듣고 말했다.

“이종범은 자신이 정말 최고였던 순간만을 기억하는 거야. 남들이 보기에 정말 극적이고 감동적인 장면도 자신이 최고였던 그때에 비하면 별로인 거지. 내가 정말 최고였던 순간, 그 기억이 그를 살아가게 하는 거지.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거고….”

2013년 8월 경기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에 자리 잡은 춘의야구장.

야구장 주변에는 적잖은 나무들이 서있다. 이른 아침이지만 더웠다. 밤을 지나 새벽이 되도록 땅 위를 떠나지 않은 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끈적끈적함을 뚫고 들리는 함성과 고함 그리고 탄식. ‘팡’ 하며 포수 글러브에 공이 박힐 때마다, ‘꺄앙’ 하는 타격음이 운동장 전체에 퍼질 때마다 들렸다.

던지고 때리고 달리고 구르고. 흰색 유니폼엔 어느새 얼룩이 졌다. 땀방울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부천시민야구협동조합’ 사람들. 주말도 아닌 평일에, 저녁도 아닌 아침에 야구를 하는 사람들이다.

시작은 조촐했다. 2006년 사회인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부천에서 아침에 야구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처음 야구장에 모인 사람은 18명. 9명씩 나눠 겨우 경기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한두 명이라도 못 나올 때면 수비 포지션을 하나씩 줄여야 했다.

입소문은 빨랐다. 주말에 2시간 남짓 야구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어느덧 ‘부천 아침 야구회’는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만 200명 가까이 될 정도로 커졌다. 현재 4개 팀이 돌아가며 경기를 치른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주중 두세 번은 오전 6시까지 글러브를 들고 모인다. 지난해 11월에는 보다 체계적인 아침 야구 리그를 운영하고자 협동조합까지 출범시켰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경기” 야구에서 삶을 배운다▼

날 최고로 만들어준 기억, 못다 이룬 꿈


내가 최고였던 기억, 그 황홀했던 순간. 아침마다 야구장에 모이는 이들도 이종범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최고였던 순간을 기억한다. 짧지만 심장에 깊이 박힌 순간. 그것이 새벽잠을 쫓아가며 출근 시간에 쫓겨 가며 야구장에 모이는 이유다.

이종범처럼 슈퍼스타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천연 잔디가 아닌 흙 밭을 뒹군다고 열정마저 작은 것은 아니다.

부천시민야구협동조합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정광호 씨(57). 실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다. 정 씨가 처음 사회인 야구를 시작한 건 1980년. 아직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정 씨는 직장에 들어간 직후 동료들의 권유로 직장인 야구팀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183cm의 큰 키에서 뿌려지는 공은 빠르게 포수 미트에 꽂혔다. 제1 선발투수는 그의 몫. 취미 삼아 하는 야구여도 에이스라는 중책은 설렘이었다.

“선발투수로 나가 타자 열 명을 연속으로 삼진 잡은 적이 있어요. 30년도 넘었지만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듬해에는 전국의 사회인 야구 최강팀들이 동대문야구장에서 경기를 벌였다. 외야석 한가운데 솟은 전광판에 뜬 자신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흥분 속에 들어선 첫 타석. 배트 중앙에 정확하게 맞은 타구는 안타가 됐다. 역시 잊을 수 없다.

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선동 씨(42)는 왼손 타자다. 2000년 11월 결혼한 이 씨는 결혼한 다음 달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신혼의 재미보단 야구의 재미에 빠져 지냈다.

“2007년 리그 경기 결승전이었어요. 동점 상황이었는데 마지막 이닝에 타자로 나섰죠. 공이 날아 오고 방망이를 힘껏 잡아당겨 쳤는데 이거다 싶더라고요. 우익수 쪽으로 공은 뻗어가고 결국 홈런이 됐죠. 빨리 뛸 필요가 없으니 천천히 베이스를 하나씩 밟을 때의 희열이란….”

이 씨는 서른이 다 돼서야 야구를 시작했다. 그에게 야구란 이루지 못한 꿈이자 한(恨)이었다.

그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는 야구부를 창단했다. 초창기 프로야구가 한창 인기몰이를 할 때라 많은 아이들에게 야구 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씨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공을 던져보게 하지도, 달리기를 시키지도 않았다. 코치는 한 가지만 물어봤다.

“아버지 뭐하시니?”

이 씨는 그 뒤로도 야구를 동경했지만 직접 하지는 못했다. 2000년 12월 꽁꽁 언 운동장에서 처음 경기를 치렀을 때 ‘왜 이제야 했을까’ 싶었다.

그는 그때부터 약 7년간이 자신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왼손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속구를 뿌렸고 커브로 타자를 속였다. 타석에 서면 짜릿한 손맛을 보곤 했다. 1년에 2, 3번씩 홈런을 쳤다. 홈런이 아니어도 좋았다. 땅볼을 치고도 그는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아픈 기억도 있다. 2011년 3월 1일 정규리그에 들어가기 전 시범경기 때였다.

땅볼을 치고 언제나처럼 내달렸다. 공을 잡은 상대팀 1루수가 1루 베이스를 밟기 위해 달려왔고 둘은 정면충돌했다. 이 씨는 넘어지며 왼손이 골절됐다. 그래도 야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야구가 하고 싶어 깁스도 하지 않고 치료를 받았다. 그 이후로 이 씨는 더이상 투수를 하지 못한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다”고 말한다.

함께여서 행복한 야구
야구로 뭉친 이들의 모습은 흡사 한 형제 같다. 이들은 각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부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야구로 뭉친 이들의 모습은 흡사 한 형제 같다. 이들은 각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부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옆에서 듣고 있던 박홍식 씨(38)가 웃었다.

“말만 저래요. 아까 보셨죠? 저 형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하는 거.”

박 씨는 뒤늦게 야구에 빠졌다. 2008년 직장 동료들과 TV 예능프로였던 ‘천하무적 야구단’을 보다가 우리도 야구 한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늦바람은 무서웠다. 그는 현재 틈나는 대로 야구 개인 강습을 받으며 실력을 키우고 있다. 그가 느낀 야구의 매력은 함께하는 즐거움이다.

“혼자 잘하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함께 파이팅 외치면서 하는 게 정말 재밌어요. 아침마다 모여서 하다보니 각자 하는 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서로 도움줄 때도 많고요.”

이수훈 씨(39)는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다 좋다”고 말한다. 경기 수준별로 리그를 나누는 주말 리그와는 달리 ‘아침 야구’는 아침에 야구를 하겠다는 의지가 첫 번째 기준이다.

이 씨는 “자기 실력 뽐내려는 사람들은 얼마 못 버티고 나간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야 함께 즐겁다”고 전했다.

꿈과 열정을 공유하는 아침 야구회 사람들은 누군가의 꿈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재작년부터 정규리그가 끝나면 가을에는 자선 이벤트 경기를 벌인다.

1루타를 치면 1000원, 2루타 치면 2000원을 적립하는 식으로 기금을 모아 소아 환자들을 돕는다. 1회 때는 연예인 야구팀인 ‘천하무적야구단’과 경기를 벌였고 작년에는 전직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모인 ‘챔피언스’ 야구단과 경기를 벌였다.

이토록 야구에 빠져 살면 가족들에게는 소홀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야구에 쏟는 시간만큼 나머지 시간은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다. 함께 야구하는 동료들과 가족 동반 여행을 가기도 한다.

박홍식 씨는 올해 여름에만 동료들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세 번 여행을 다녀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박 씨의 아들은 5개월 전부터 리틀야구단에 들어갔다.

요즘 박 씨의 큰 즐거움은 아들과 함께 캐치볼을 하는 것이다. 박 씨는 아들이 전지훈련을 가면 따라 가려고 최근 캠핑카도 마련했다. 사실 가족들의 응원이 없다면 이렇게 꾸준히 야구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정광호 씨의 첫째 딸은 최근 아빠의 야구화가 해진 걸 보고 새 신발을 선물했다.

야구에 빠지면 매일 야구를 해도 아직 하고 싶은 야구가 많다. 주로 외야수로 뛰는 이선동 씨는 머리 위로 넘어가는 공을 다이빙 캐치로 잡고 싶다. 포수인 박 씨는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멋지게 아웃시키고 싶다. 이수훈 씨는 밀어쳐서 홈런을 날리는 순간을 꿈꾼다.

이들은 하나같이 “숟가락 잡을 힘만 있다면 야구를 하겠다”고 말한다. 3년 전 이종범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은퇴 시기를 놓고 말들이 많자 “왜 박수 칠 때 떠나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박수 치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결국 마흔을 넘어서까지 선수로 뛰었다.

이종범에게도, 부천에서 아침 야구를 즐기는 이들에게도 야구는 불덩이다. 내가 최고였던 기억을 살려주고 어린 시절 꿈을 실현하게 해주는, 그리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심어준 식지 않는 불덩이. 불덩이를 심장에 품어본 사람은 안다. 쉼 없이 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천=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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