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종수]원로들이 있어야 할 자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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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익과 당파를 초월
사회통합-화합 힘써야할 원로들
칠순 넘어 공직에 욕심내고
대선후보에 줄서 존재감 과시
본인은 구국의 결단일지 몰라도
특정분파에 대한 집착이요
특정분파 승리에의 기여일뿐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사회적 원로를 대접하고, 그 원로들이 나라 전체를 위해 헌신토록 하는 영국의 제도에 새삼 눈길이 간다.

정치, 문화, 스포츠, 학술, 기업, 군, 연예 등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존경받는 삶을 산 원로들에게 왕은 작위를 수여한다.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여생은 물론 사후까지 ‘서(Sir)’나 ‘로드(Lord)’ 혹은 ‘레이디(Lady)’라는 경칭으로 예우를 받는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제도가 아님에도, 그 효과는 크다. 일반인들에게는 훌륭한 시민의 삶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보여주고, 작위를 받는 당사자들에게는 사익과 분파를 넘어 전체를 위해 헌신코자 하는 동기를 갖게 해준다. 명예를 존중하는 사회적 규범을 세워주는 건 물론이다. 세계 제일의 축구팀을 이끌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 ‘양들의 침묵’과 ‘섀도 랜드’에서 빛나는 연기를 펼쳤던 배우 앤서니 홉킨스, 코미디계의 별 노먼 위즈덤, 키 작은 골프황제 이언 우즈넘,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와 노동당의 닐 키녹 당수 등이 얼마 전까지 작위를 받은 사람들이다.

원로를 존중하며 여생을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봉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전통은 영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도 있었다.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나이 많은 대신들이 공직에서 은퇴할 때, 임금은 궤장(궤杖)을 하사했다. 의자와 지팡이였다. 평생 나라와 백성을 위해 수고했으니, 이제는 편히 쉬며 원로의 역할을 해달라는 임금의 당부였다. 궤장을 하사받은 사람은 그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여겼고 궤장연이라는 잔치를 벌여 자축했으며, 궤장은 가보로 전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지금도 그 궤장과 궤장연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최근 74세 대통령비서실장이 등장하면서 여러 말이 오가고 있다.

고령화시대에 새롭게 나타나는 인사 스타일이라는 평에서부터, 원로로서 그런 자리를 고사하고 전체 사회의 어른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아니냐는 아쉬움에 이르기까지. 비서실장 외에도 새만금위원장, 문화융성위원장, 국민대통합위원장, 지역발전위원장이 모두 칠순을 넘기고 공직을 그만둔 줄 알았던 분들로 채워짐으로써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수군거림이 관가에 오간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해 대선을 생각해 보면, 원로가 있어야 할 사회적 자리가 비어 있는 공백은 더욱더 커 보인다. 사회 원로, 특히 정치 원로라고 하는 분들의 행보가 어지러웠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보수와 진보 원로들이 보여준 줄서기 현상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 씨는 새누리당으로 진로를 바꾸고 김덕룡 김현철 윤여준 씨는 민주당 쪽으로 갔다. 수많은 장성 출신, 법조 원로, 그리고 엄정한 중립을 생명으로 여기는 경찰이나 국정원 출신의 인사들, 안방극장의 스타들까지 대선 후보 곁에 갑자기 나타났다. 오랜 세월 국민에게 알려진 입장과는 다른 내용으로 말이다.

‘6인회’, ‘7인회’도 마찬가지다.

본인들은 구국의 결단으로 정권창출에 다시 관여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다른 에너지가 넘쳐 현장에서 끝까지 활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분파에 대한 집착, 그리고 특정한 분파의 승리에 기여한 것일 뿐이다. 그분들이 있어줘야 할 원로의 자리는 텅 비워놓고 말이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 그리고 우리 역사의 어떤 시점보다도 강력한 원심력에 휘둘리고 있다. 일제치하를 거치는 동안 우리 내부에 심각한 분열의 상처가 남게 되었고, 6·25전쟁으로부터도 63년, 그리고 휴전선으로부터 40km의 거리에 오늘의 우리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던 그 비극으로부터 충분한 시간적 이격의 거리를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변화들이 밖으로부터 오고 있고, 그에 따른 파열음이 크다. 친미와 반미를 둘러싼 극단적 대립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사회 각 분야의 원로들이 일정한 연령에 이르고도 자신의 사익과 당파를 초월하여 전체 나라와 국민을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화합과 통합은 어려운 과제다.

새삼 나는 ‘서(Sir)’라는 호칭이 갖는 역사의 무게가 부럽고, 궤장이 갖는 의미의 형상이 그립다. 그 알량한 전별금의 무게에 비하겠는가! 바라보는 높이와 사회적 효과의 측면에서 말이다. 다시금 우리가 명예를 존중하는 규범을 세우고 그러한 유산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계속 지불해야 할 듯하다.

돈과 권력 이외에 바라보는 게 없는 사회라면 실력자들일수록 벌거벗은 모습으로 이권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현직자들은 퇴직 후 앉을 자리를 얻기 위해 합법을 가장한 특혜를 나눠주기에 바쁘고, 퇴직한 원로들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분파적 활동을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려 할 것이다. 그 너머 원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덩그러니 비워놓고 말이다. 그게 우리 사회의 아쉬운 풍경이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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