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학교 정글에서 살아남을 길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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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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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 차장
정용관 정치부 차장
“나는 그의 눈에서 천진난만한 정직함(childlike honesty)을 보았다.”

뮤지컬 ‘반지의 제왕’을 작곡한 발리우드 음악가 A R 라만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며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올해의 100인을 발표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다.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학생과 학부모 팬을 확보한 인도 영화배우 아미르 칸. 그가 박근혜 대통령 등과 더불어 ‘100인’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반가움과 함께 그가 주연한 영화 ‘세 얼간이’ ‘지상의 별처럼’ 등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주입식 획일화 교육, 취업을 위한 무한경쟁에 맞서 ‘알 이즈 웰(All is well)’을 외치며 자신의 꿈과 끼를 맘껏 발현한 최고 얼간이 란초는 나머지 두 얼간이의 ‘데미안’ 같은 멘토였다.

상상력이 뛰어나지만 난독증으로 몇 차례 유급 위기에 처하며 구제불능의 문제아로 찍혀 있던 이샨은 자신도 난독증을 겪었던 미술 선생님 니쿰브를 만나 숨겨진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지상의 별처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특별하다. 넘버원이 아니어도 돼. 넌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한 명(only 1)이니까.”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1학년생인 두 딸아이가 스토리를 거의 외울 정도로 이들 영화를 보고 또 본 것은 영화 자체도 재밌지만 아마도 자신의 현재, 그리고 미래 모습에 대한 감정이입 때문이리라. 두 해 전 작은아이는 내게 ‘내 인생은 싱싱했다만 지금은 시들었도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온 적도 있다.

새삼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안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며 느낀 바가 많았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 ‘세 얼간이’를 보면서 “내 아이에게 란초와 같은 천재성이 있다면…”이라는 상상도 했었다. 그렇다면 밤늦게까지 학원 레벨 업 시험 때문에 ‘haggle’(실랑이를 벌이다) ‘plethora’(과잉) 같은 어려운 영어단어 외우느라 진을 빼는 아이들 닦달할 이유가 없을 거다. “아이들이 영화를 몇 번이나 봤으니 주요 대사는 외웠겠지. 미국에선 인도인 사장이 많아 인도 영어 배우는 것도 유행이라던데…”라는 생각까지 들자 가슴 한쪽이 돌덩이로 누른 듯 답답해졌다.

이러니 집집마다 전쟁이다. “공부는 그냥 숨쉬기처럼 늘 하는 거야. 숨을 한꺼번에 몰아쉴 수는 없지 않니?”라는 어느 교수의 말을 빌려 달래본다. 허나 집 안과 집 밖의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하루에도 몇 번씩 넘나들며 내적 갈등을 겪는 아이들에겐 그저 스트레스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꿈과 끼를 살리는 행복교육’이란 박 대통령의 교육 비전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다만 현실은 비합리적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당장 중학교 자유학기제만 하더라도 취지와는 달리 학생들을 더 많은 사교육으로 내모는 결과만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 대통령이 조각 후 첫 국무회의에서 강조한 ‘교과서 외 시험 출제 절대 금지’ 방침을 놓고도 논란이 많다. “지식이라는 게 고전을 포함한 수많은 책이나 신문 등을 접하며 입체적으로 형성되는 것 아니냐” 등의 현장 반응이 들린다. 내 문제가 아니면 절박하지 않은 법이다. 대입 전형을 결정짓는 회의에 참석한 보직 교수들이 “뭔 얘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며 하품만 하더라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내 아이들이 학창시절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할 시간이 있을까. 란초나 데미안 같은 멘토를 만날 수 있을까. 성인이 됐을 때도 과연 ‘천진난만한 정직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학교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워야지, 하면서도 허리가 휠 정도의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교육#경쟁#학교#학부모#세 얼간이#지상의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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