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하태원]김오랑과 군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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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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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겨”라는 한마디에 완전무장한 군인들의 M16 소총이 불을 뿜었다. 굳게 닫힌 듯 보였던 특전사령관 집무실 출입문은 이내 종잇조각처럼 너덜너덜해졌다. 특전사 예하 3공수여단 정예 병사들의 하극상을 막고 있던 사람은 특전사령관 부관 김오랑 소령.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던 김 소령은 배와 허벅지에 총알 6발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1979년 한남동 육군총장공관에서 울린 한 방의 총성으로 시작된 12·12쿠데타가 사실상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15분 정도 지나고 있었다.

▷육사 25기 출신인 그는 1970년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뒤 돌아와 특전사와 연을 맺었다. 한 육사 생도는 졸업앨범 ‘북극성’에서 김오랑을 “불의와 타협을 모르는 냉철한 사나이”로 평가했다. 쿠데타 직전 신(新)군부의 집요한 회유를 뿌리친 강직한 군인이었다. 죽음으로써 군인의 명예(名譽)를 지키려 했던 그의 희생이 안타깝다. 동기생인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김오랑의 묘를 찾아가 통곡한 일 때문에 한때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는 말도 있다.

▷야산에 묻혔던 김오랑은 1980년 동기생들의 탄원으로 국립묘지에 이장됐고 1990년 중령으로 추서(追敍)됐다. 하지만 김오랑의 모친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2년 만에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졌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읜 충격으로 시신경 마비증이 악화돼 결국 완전히 시력을 잃은 부인은 1991년 실족사했다. 남편의 잘못이라면 전두환 신군부의 성공한 쿠데타 쪽에 줄을 서지 않은 것뿐이다.

▷국회 국방위원회는 그제 전체회의를 열고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쿠데타 세력에 맞서 목숨을 바친 참군인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의 길이 뒤늦게 열린 셈이다. 하지만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상훈법상 무공훈장 추서 대상자는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으로 무공을 세운 자’라며 난색이다. 계엄 상황에서 중화기를 이용해 내란(內亂)을 획책한 세력을 막으려고 온몸을 던진 군인에게 보상을 하자는데 국방부가 제동을 걸고 나서는 건 아이러니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김오랑#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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