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동강난 시체? 가짠데 뭘…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7월 28일 02시 50분



여자친구와 배우 전지현이 출연하는 영화를 본 뒤 뭐라고 소감을 말해야 할까. “전지현이 예쁘다”고 말하면 낙제점이다. “전지현이 불쌍하다”고 말해 보자. 사진 제공 코렐픽쳐스 [화보]영화 ‘블러드’ 주연배우 전지현
여자친구와 배우 전지현이 출연하는 영화를 본 뒤 뭐라고 소감을 말해야 할까. “전지현이 예쁘다”고 말하면 낙제점이다. “전지현이 불쌍하다”고 말해 보자. 사진 제공 코렐픽쳐스
남자를 당혹하게 하는 영화 여친과 볼 때는 어떻게 하나
극장은 데이트하기엔 최적의 공간이다. 어두침침한 곳에서 두 시간 동안 같은 영화를 보노라면 청춘남녀 사이에 감성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잖은 남자들은 여성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가 ‘본전’도 못 건지는 낭패를 당한다. 공포영화를 보다가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거나 슬픈 멜로영화를 보다가 “엉엉” 목 놓아 울어버림으로써 영 체면을 구기고 마는 것이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영화와 맞닥뜨렸을 때 남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것인가! ‘궁금남’과 ‘해결남’의 문답 형식으로 알아보자.
궁금남: 여자친구와 함께 미국 공포영화 ‘블러디 발렌타인’을 보았습니다. 근데 옆에 앉은 여자친구보다 제가 더 크게 놀라서 민망했습니다. 마스크를 쓴 살인마가 밀폐된 탄광에서 다짜고짜 곡괭이를 휘둘러 대는데…. 공포영화를 보면서 겁에 질리지 않는 비법은 없나요?
해결남: 왜 없겠어요? 있습니다. 일부 남성은 공포영화를 보다가 무서운 장면이 나올라치면 미친 듯이 팝콘을 집어 먹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자기가 겁에 질렸단 사실만 만천하에 공개하는 꼴이니까요.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남자도 있는데요. 여자에게 한 번이라도 발각되면 이건 만회가 불가능합니다.
이럴 땐 스크린을 더 뚫어져라 쳐다보십시오. 그러면서 ‘아, 이건 순 가짜일 뿐이야’라는 자기암시를 거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 몸이 동강이 나 버렸네? 저 시체는 어떤 소재로 만든 인형일까?’ ‘살인이 벌어진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인 현장의 피가 검붉은 색이 아니라 선홍색으로 표현돼 있네? 아유, 아마추어들 같으니라고…’ 같은 생각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몰입을 차단하는 겁니다. 조루증 남자들이 마음속으로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세거나 회사 부장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살인마가 휘두르는 곡괭이는 중국산일까? 튼튼한 걸로 봐서는 아닌 듯한데…’ 같은 논리적 상상도 효과적입니다.
궁금남: 그럼 ‘해운대’처럼 눈물이 나오는 영화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좋지만, 질질 짜는 모습을 여자친구에게 보이긴 싫습니다.
해결남: 지진해일이 몰려온 해운대의 한 호텔 엘리베이터에 갇혀 수장(水葬)되어 가는 엄마(엄정화)가 딸과 마지막 통화를 나누는 모습은 특히 눈물을 참기 어렵지요. 이럴 때도 공포영화와 같은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익사하지 않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엄정화의 발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엄정화의 발볼은 몇 cm일까’ ‘엄정화가 발톱에 바른 페디큐어는 무슨 색일까’ 하고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경우는 눈물을 참지 말고 흘릴 것을 권장합니다. 감성지수가 높은 남자로 보이는 게 요즘 트렌드니까요. 대신 호들갑스럽게 눈을 자꾸만 껌벅껌벅하지 말고, 어느 순간 눈을 질끈 감아줌으로써 눈물이 ‘주룩’ 하고 하나의 줄기를 이루어 흐르도록 해주세요. 이때 손바닥을 이용해 딱 한 번 절도 있게 눈물을 훔쳐내 주시면 아주 ‘쿨’하게 보입니다.
궁금남: 전지현이 나오는 영화만 보고 나면 여자친구와 다툽니다. 얼마 전 전지현이 뱀파이어 여전사로 나왔던 영화 ‘블러드’를 보았는데요. 제가 “전지현 진짜 예쁘지 않니?” 하고 말하니까 여자친구가 대뜸 “예쁘면 뭐해? 연기도 더럽게 못하는데!” 하고 쏘아붙이는 겁니다. 전지현 출연 영화를 우리 커플이 슬기롭게 관람할 방도는 없을까요?
해결남: 아, 요즘 전지현은 ‘사교육’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궁금남: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해결남: 동네북이란 얘기죠. 뭘 해도 좋은 소리 못 듣는 분위기란 말입니다. 사실, 이번 ‘블러드’에서 전지현은 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어 연기도 좋았고, 표정이나 액션도 과장되지 않았어요. 배우로서 많은 고민과 수련을 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전지현은 억울하게 평가절하당하지 않습니까? 최근엔 유명 휴대전화 CF 모델에서도 하차하면서 “전지현의 시대가 간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요. 바로 이런 점을 콕 집어 언급하는 겁니다.
궁금남: 예?
해결남: “전지현이 여전히 예쁘다”고 하지 말고, 대신 “전지현이 불쌍하다”고 여자친구에게 말해보십시오. 예쁜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잊히는 여자는 동정의 대상이 되거든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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