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투자 강요’ 정부, ‘계획 급조’ 기업

  • 입력 2009년 7월 23일 20시 03분


삼성전자의 효자 사업인 반도체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업 구상에서 본격 진출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74년 부도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TV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반도체 사업을 한다며 반대가 거셌다. 1983년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한다고 발표했을 때도 회의적 반응뿐이었다.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작은 내수와 빈약한 기술력 같은 이유를 들어 실패를 예측했다. 다른 간판급 기업들의 창업 과정도 비슷한 점이 많다.

갑자기 늘린 투자 규모

당시 기업들은 투자하려고 해도 정부 허락을 받지 못하면 사실상 투자가 불가능했다. 공장을 지으려면 자본과 땅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 허가 없이 은행대출이나 차관, 공업용지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정반대가 됐다. 기업들은 투자에 신중한 반면 정부는 제발 투자 좀 하라고 때론 읍소하고 강요도 하는 모습이다. 연초에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금고에 100조 원이 있는 것을 안다”고 했을 때는 ‘협조 요청’ 수준이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이달 초 “기업이 선제적 투자를 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라고 말했을 때는 기업들도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자동차 업계는 전폭적인 혜택을 준 만큼 이에 상응하는 성의를 표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금은 기업이 투자할 때”라며 구체적인 규모까지 거론했다.

서슬에 놀란 기업들은 갑자기 투자 규모를 늘리고 패키지 투자 계획을 내놓았으나 정부의 투자촉진대책처럼 두루뭉술하다. 이런 식의 투자 요청은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이다. 급조된 투자 계획이 수익성과 전망을 치밀하게 따졌을 리도 없고, 계획대로 집행하기도 힘들 수밖에 없다. 과거 정부에서 일본에 무역 역조를 시정하라면서 “일본 기업들은 왜 한국에 투자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 기업들이 투자 수익을 따져 투자하지, 무역 역조를 시정하기 위해 투자할 리 없지 않는가.

정부가 기업에 투자를 촉구할 만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민간 설비투자가 8개월째 마이너스를 헤매고 정부의 재정 지출도 실탄이 많지 않다. 누군들 기업에 투자 요청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부는 왜 기업이 과거와는 달리 투자에 신중해졌는지 곰곰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기업들은 한국에서 점점 투자할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젊은층 인구는 줄어 시장이 축소되고 교육 의료 방송같이 시장성이 있는 분야는 규제가 투자를 가로막고 있으니 투자 의욕이 생길 리 없다. 감면해준다던 법인세는 오락가락하고, 노동법이 무서워 직원도 맘대로 채용할 수 없는 터에 투자할 기분이 날까. 방송 분야에 규제 칸막이가 일부 제거됐다지만 의료 교육 같은 분야는 아직도 고쳐야 할 게 많다. 젊은 인구가 많고 투자환경이 더 좋은 나라도 많은데 정부 강요에 못 이겨 전망도 없는 곳에 투자한다면 유망기업이 아니다. 정부는 투자를 막는 제도부터 개선해야 한다.

칸막이 규제 아직도 많다

기업들도 소심해졌다. 77년간 세계 1위의 자동차 메이커였던 GM의 파산은 생산라인 늘리기식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대량생산형 대기업 시대가 끝났다고 지적한다. 30년 전 반도체처럼 유망분야라면 모를까 정부가 기업에 투자를 강요하다 부실투자가 되면 누가 책임질 건가. 태양광발전처럼 버블을 만들 거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성장엔진이다. 엔진이 부실하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배가 고프다고 황금 알을 낳는 기업을 하루아침에 잡아먹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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