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43>

  • 입력 2009년 7월 23일 13시 57분


[무사시의 목소리]

유람선에서의 쇼케이스가 끝난 후부터 며칠 동안 뚱보 보르헤스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밤만 되면 무사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질문을 받고도 한참 후에 대답하는 스타일인 무사시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느린 편이다. 그 목소리는 사람의 뇌리에 오래 남는 '묘한 능력'을 지녔다.

보르헤스가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꺽다리 세렝게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글라슈트의 중앙정보처리시스템을 손보고 있었다. 보르헤스가 길게 하품을 쏟은 후 힘겹게 말을 건넸다.

"쇼케이스 때 무사시 녀석이 했던 말 때문에 요즘 잠을 설쳐."

"너두야?"

세렝게티가 놀란 듯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다.

"혹시 너……."

"목! 돌! 리! 기!"

둘이 합창이라도 하듯 함께 '목돌리기'를 외쳤다. 세렝게티도 그 단어가 오랫동안 맘에 걸린 모양이었다.

"나도 그 날 무사시의 건방진 얘기를 들은 후 잠이 오지 않더라고. 몸이 으스스하고, 뭐랄까…… 하여튼 기분이 아주 나빴어."

격투 로봇에게 언어기능을 반드시 넣을 필요는 없었다. 초창기 격투 로봇들의 경우 상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언어기능을 대부분 생략했다. 그 기능을 넣으면 얼굴이 커질 뿐만 아니라 인지적 용량을 격투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러하듯, '사람을 닮을 이유가 없는 부분까지도' 격투 로봇은 사람을 닮아갔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전설의 격투 로봇 '킹 모라벡'이 대중 앞에서 '비록 프로그램된 것이긴 했지만' 유창한 연설로 사람들을 흥분시켜 큰 인기를 끌면서, 격투 로봇도 하나둘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휴머노이드에게 말은 인간에게 친밀감을 주고 때론 동일시를 도왔다.

인간과 목소리가 흡사한 로봇을 탄생시키려는 노력은 '휴머노이드의 역사'에서 중대한 기여를 해왔다. 음향학과 컴퓨터 공학을 연구하던 20세기 과학자들은 SF영화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에게 사람의 목소리를 선물하고 싶었다.

1950년대부터 뉴욕 근교 뉴 저지주에 위치한 프린스턴대학을 중심으로 '사람 목소리로 말하는 컴퓨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기본적인 음들의 파형을 변조해서 다양한 색깔의 소리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장치는 종소리, 바이올린 소리, 피아노 소리, 드럼 소리 등을 아주 똑같이 흉내 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 목소리였다. 사람 목소리는 파형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리 로봇의 목소리를 수정해도 계속 '기계적인 음성'이 났다. 결국 정부는 더 이상 그들의 연구에 돈을 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1965년 전설의 과학자 로버트 무그가 이 프로젝트의 후임 책임자로 들어왔다. 그는 사람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데 집착하지 않고 이 장치를 다른 곳에 사용하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신디사이저'란 악기다.

신디사이저는 전기적 잡음을 발생시킨 후 이것의 파형과 진폭, 주파수 등을 변형시켜 온갖 악기 소리를 만드는 장치다. 초기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는 전자음을 발진시켜 만들어진 소리를 기본 소스로 여러가지 필터를 거쳐 다양한 악기 소리를 만들어냈지만, 뒤이어 나온 디지털 신디사이저는 자연음 변형에 성공하면서 발생 가능한 소리의 영역이 크게 확대됐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일반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신디사이저 기능' 때문이었다. 휴머노이드는 파티 때마다 근사한 오디오처럼 음악도 틀고, 밴드처럼 연주도 하고, 노래방 기계처럼 반주도 곁들이며 흥을 돋았다. 최근 휴머노이드 로봇에겐 대략 120만 곡이 탑재돼 있으니, 이 보다 더 훌륭한 개인 악단은 없었다. 악보를 그대로 따라가는 그들의 연주는 재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품이었다.

무사시는 신디사이저형 음성장치가 낼 수 있는 가장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쇼케이스 무대를 압도했다.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입니다. 무사시에게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결승전에서 글라슈트를 이기기 위해 새롭게 준비한 필살기가 있나요?"

"……."

잠시 긴장된 침묵이 선상을 감싸 안았다. 몇 십 분 같은 몇 초가 흐른 후, 무사시가 입을 열었다.

"나는 특별히 준비하지 않았다. 글라슈트는 내가 싸워야할 수많은 로봇 중 하나니까. 다만 글라슈트가 4강전에서 한 행동을 봤다. 매우 건방진 행동이었다. 다시는 그와 싸우는 일이 없도록 이번 결승전에선 목돌리기로 그의 머리를 뜯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밟아버리겠다."

무사시는 존댓말 기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흐른 후, 로봇 MC 남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농담도 건네고 최 볼테르에게 밝은 질문도 던졌지만, 분위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보르헤스와 세렝게티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목돌리기의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사시의 목소리는 21세기 초 테크노 음악에서나 들을 수 있는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악기 소리는 똑같이 들려주되 사람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바꾸는 신디사이저 덕분에 20세기 말 테크노 음악이 세상을 평정하고 대중 음악사에 '혁명'으로 기록됐지만, 요즘 로봇의 목소리는 사람을 꽤 닮은 편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시가 계속 기계 음성을 사용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처럼 보였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가정마다 한 대씩 보급된 것도 휴머노이드 로봇의 언어 기능 덕분이었다. 백과사전과 17개 언어사전이 통째로 수록되어, 무엇이든 물어보면 바로 답을 하고, 대학입학 시험 준비용 '과외 기능'까지 탑재된 교육용 도우미 로봇이 등장하면서, 언어는 휴머노이드에게 '필수품'이 되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로봇에게 친밀감을 느끼면서 휴머노이드가 대중화되었다면, 무사시는 쇼케이스에서 정확히 그와 정반대되는 효과를 노렸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읊조린 '목돌리기'는 너무 잔인하여 로봇격투기대회에서 '반칙'으로 인정하고 있는 금기기술이었다. 대부분의 격투 로봇은 연약한 목 부위를 다치지 않도록 티타늄과 알루미늄 합금으로 목심을 박았고, 그마저 안심이 되지 않아서 법적으로 금지시킨 기술이 바로 목돌리기였다. 목을 공격하는 것은 괜찮지만, 돌려서 뜯어내는 것은 배틀원 경기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그날 무사시는 반칙을 저지르겠다고 공식 석상에서 공언을 한 것이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로봇격투기협회는 무사시의 발언에 유감을 표시했고, '본 경기에서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성명서도 발표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공개 석상에서 반칙을 공언하는 겁니까? 자라나는 청소년이 관람하는 경기에서 그런 추악한 행동을 하겠다는 겁니까?"

볼테르도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글라슈트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무사시의 한 마디에, 다시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프린스턴 대학의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컴퓨터' 프로젝트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휴머노이드 로봇세계는 어떻게 됐을까? 로봇이 내는 목소리가 인간의 그것과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졌다면, 사람들은 그런 로봇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소름 끼쳤을 테니까. 신디사이저는 사람 목소리가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깊고 오묘한 소리'임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증거다.

그러나 무사시는 기계적인 음성으로 보르헤스와 세렝게티, 그리고 쇼케이스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목소리가 사람을 닮아서가 아니라, 그의 잔인한 메시지가 사람을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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