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7>

  • 입력 2009년 7월 15일 14시 25분


"부엉이 빌딩과 <보노보> 방송국 폭파를 지시하셨습니까?"

깜빡임 두 번.

"사후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깜빡임 한 번.

부엉이 빌딩 테러는 '자연인 그룹'에서 벌인 일로 인정한 것이다. 석범이 바싹 다가앉았다.

'자연인 그룹'은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미주의 저서들이 '활동 원칙'의 역할을 했지만,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과 실행은 각 분파별로 이뤄지는 경우가 잦았다. 사후 보고를 받았다면, 부엉이 빌딩 폭파는 미주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강경파의 소행이리라.

"연쇄살인도 '자연인 그룹' 짓인가요?"

깜빡임 두 번.

석범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강경파로부터 사후 보고를 받았나요?"

두 번.

"'자연인 그룹'과 무관하다는 겁니까?"

한 번.

"노 원장과 연쇄살인 사건에 관해 의논한 적은 있습니까?"

힘겹게 한 번.

"범인이 누군지…… 혹시 압니까?"

미주의 양 볼이 씰룩거렸다. 발끝에서부터 무릎을 타고 허벅지와 엉덩이를 지나 허리까지 극심한 고통이 출렁댔다. 페이빈이 말기에 이르면 뼈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아픔이 밀려든다고 했다. 미주가 눈을 꼭 감고 고통을 참아냈다. 석범은 마음이 급했다. 일그러진 미주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범인이 누굽니까?"

그 아픔이 가슴을 치고 목줄기를 따라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미주는 고개를 좌우로 미친 듯 흔들어댔다. 석범이 미주의 앙상한 어깨를 누르고 물었다.

"범인을 알죠?"

그 순간 미주가 눈을 번쩍 떴다. 실핏줄이 터져 흰 자위가 온통 붉었다. 미주가 눈을 깜빡였다.

한 번!

"안다고……."

문장을 맺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그리고 빠르게 또 한 번!

세 번의 깜빡임은 규칙을 벗어난 것이다. 석범이 소리쳤다.

"뭡니까? 한 번입니까 두 번입니까? 다시 해요. 당장 처음부터!"

그 순간 미주가 깊은 기침과 함께 피를 쏟았다. 분수처럼 튀어나온 피가 석범의 얼굴과 목덜미를 때리고 흘러내렸다.

"미주야!"

밖에서 기다리던 윤정이 뛰어 들어왔다. 따라 들어온 여자 둘이 멸균 장갑과 마스크를 쓴 채 미주를 돌보는 사이, 윤정이 물통과 수건을 석범에게 내밀었다.

"씻어내. 어서."

석범은 물통과 수건을 뿌리치고 미주를 쳐다보았다. 미주의 온몸도 피투성이였다. 썩은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은 동자를 빙빙 돌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 눈을 자주 깜빡였지만, 눈동자 돌리기를 쉬지 않았다. 그 검은 동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은석범 자신을 찾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비켜요!"

석범은 미주의 얼굴과 목덜미에서 피를 닦던 여자들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무의자에 털썩 앉았다.

"엄……마!"

미주의 쉼 없이 돌아가던 검은 동자가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석범 쪽으로 동자가 움직였다.

석범이 미주의 헝클어진 하얀 머리카락을 넘겼다. 자글자글 주름진 이마가 드러났다. 석범은 가만히 그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자들이 달려들어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윤정이 그들의 팔을 잡아끌었다. 최후의 시간이 콧잔등에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범아!"

석범이 급히 이마에서 입술을 떼고 미주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석범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후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 가까이 귀를 댔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녀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모든 기력을 혀끝에 올려 담는 중이었다.

푸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단어를 만들려고 해도 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푸흐, 푸흐흐!

미주는 포기 하지 않고 자꾸 혀를, 턱을 그리고 성대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단어들이 석범의 귀로 빨려 들어갔다.

"엄말…… 용, 서하렴!"

미주의 고개가 왼편으로 젖혀졌다. 여자들이 달려들어 맥박을 잰 후 울음을 터뜨렸다. 윤정의 손이 등 뒤에서 석범의 어깨를 짚었다.

"잘 했다!"

석범은 그대로 앉아서 더운 눈물을 쏟아냈다. '고아'의 느낌이 한 순간에 그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팽개쳤다. 엄마는 용서를 원했지만, 아들은 끝까지 그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멀리서 '눈보라 뒤에' 마을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은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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