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계속된 풀뿌리 민주주의와 정당공천 논란

  • 입력 2009년 7월 5일 07시 16분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군구 기초지방자치 단체장과 의원 선거에서 정당의 개입을 막자는 주장이 또 다시 제기되고 있다.

1일에는 고건 전 국무총리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원로 55명이 기초지방선거의 정당 공천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좌우 언론들도 비슷한 주장을 지면에 싣고 있다.

정당이 풀뿌리 민주주의에 득이 되느냐, 독이 되느냐 하는 논란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후 20년 동안 정치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꾸준히 쟁점화된 문제다.

지방선거 정당공천은 1991년 광역의원을 시작으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광역단체장·의원, 기초단체장까지 시행됐고, 2006년 지방선거부터는 기초의원에까지 도입됐다.

● 민자당 지방선거 정당 추천제 뒤집자, DJ 단식 투쟁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0년 10월, 평민당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당 추천제 등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했다. 이것이 유명한 'DJ 13일 단식' 사건이다.

제6공화국 출범 후인 1989년 4당(민정당·평민당·민주당·공화당) 합의에 따라 정당추천제를 도입하기로 했으나, 3당 합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통합) 후 민자당이 "지방행정까지 정치에 오염 된다"며 기초, 광역 자치단체 선거에서 정당 추천제를 배제하려 했기 때문.

단식을 푼 후에도 김대중 총재는 정당공천 문제가 타결되지 않으면 정기국회에 계속 등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1월 17일 여야는 총무회담을 열어 지방자치제 협상을 타결짓고 국회를 정상화했다. 정당공천제는 광역지방의회­단체장선거에만 허용하고 기초지방의회­단체장선거에는 배제하되, 차기 선거부터 정당공천제를 채택할 것인지 여부는 여야가 협의로 하겠다고 유예한 것이다. 1991년 3월 26일 구·시·군의회의원선거가 전국에서 일제히 시행됐고, 같은 해 6월 20일에는 시·도의회의원선거가 치러졌다.

● YS 기초선거 정당 배제 주문… DJ·JP "안돼"

논란은 1기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행되던 1995년 되풀이된다. 이때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다.

선거를 치르기 4개월 전인 2월, 김 대통령은 "기초단체장이 정당에 소속될 때 과연 지방행정이 순탄하게 되겠는가"며 정당공천제 폐지를 강력히 주문했다. 이에 고무된 여당 민자당은 민주계 소장파 주도로 이 같은 선거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자극받은 민주당은 임시국회 폐회 하루 전 국회의장공관과 이한동 부의장자택을 전격점거, 두 사람의 발을 묶었다. 민주당은 또 민자당 소속 김기배 국회내무위원장과 황윤기 간사를 지방으로 격리, '납치논쟁'까지 일었다.

다시 김대중 전 총재가 나섰다. 당시 정계 은퇴 상태였던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강연회에서 "정당공천배제는 위헌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등 공천 협상에 있어서 야당의 '방향타' 역할을 했다. 민자당을 탈당한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이번에는 김대중 전 총재의 편이 섰다.

공천 배제를 둘러싼 여야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여당은 김대중 김종필 양김의 자금원과 지방인맥을 약화시키고자 했고, 야당은 공천하지 않으면 기초 의원과 단체장이 전부 여당 편이 돼버려 차기집권에 곤란하다는 계산을 했다. 결국, 국회의장이 억류되는 등 진통 끝에 3월 14일 여야는 기초지방의원선거에서 정당공천을 배제하는 통합선거법개정안에 합의했다.

● 공천권 쥔 여야, "정당공천이 맞다" 한 목소리…기초단체장과 의원은 "반대"

이렇게 치열했던 여야지만, 이제 와선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공식적으로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지지하고 있어 관련 법 개정은 국회 논의조차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가 현역 국회의원들이기 때문이다.

3월 30일 안경률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국회의원 및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연석회의에서 "한나라당의 기본 입장은 기초단체장-지방의원의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변함없는 원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민주당은 6월 4일 의원워크숍에 앞서 배포한 보도 자료에서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꾸준히 추진하되, 정치개혁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초단체장 정당공천제 폐지론에 대해선 반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기초의원 선거에도 정당공천이 도입된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 이후, 국회 내에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 폐지 목소리가 나오자 여야 지도부가 제동을 걸기도 했다.

반면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공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국회의원 연구단체 지방자치발전연구회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의 73.9%가 정당공천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천 탈락 후 중앙당 관여에 반발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단체장도 생겼다. 올 3월부터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장과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국민운동 본부'가 결성되어 현재 1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중앙당과 국회의원들이 공천권을 휘두르면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은 주민보다는 지역 국회의원의 눈치를 더 보게 되고, 공천을 둘러싸고 검은돈이 오가고 비리와 부패가 난무해 결국 지방 자치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공천 폐지론의 요지다. 하지만, 정당공천이 책임정치 구현 측면에서 옳다, 공천제가 폐지되면 토호세력이 지방자치단체를 장악할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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