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선원 지광스님 “서울대 중퇴는 거짓…두려웠다”

  • 입력 2007년 8월 18일 20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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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 능인선원 원장 스님이 18일 오후 강남구 포이동 능인선원에서 자신의 허위 학력 사실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지광 능인선원 원장 스님이 18일 오후 강남구 포이동 능인선원에서 자신의 허위 학력 사실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서울대’ ‘기자출신’을 트레이드 마크로 해 지난 20여년간 강남의 능인선원(포이동)을 전국 최대의 대표적 도심사찰로 성장시켰던 지광(智光·속명 이정섭·57) 스님이 18일 자신의 서울대 중퇴 학력이 허위임을 밝혔다.

지광 스님은 18일 오후 능인선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뒤 “참회하겠다. 죄송하다”고 거듭 밝혔다. 84년 설립된 능인선원은 지광스님의 엘리트 경력과 강남의 대형교회와 유사한 포교방식으로 급성장해 지금은 신도 25만명을 자랑하고 있다.

지광 스님은 이날 능인선원에서 예정됐던 ‘찰라 차크라 만다라전’에 예고없이 불참했으나 사실확인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요청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시종 어둡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는 “우선 먼저 부처님께 참회드리고 저를 아는 많은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해드려 송구스럽다. 앞으로 참회하며 사는 방법을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고교 졸업 후 1976년 당시 학력제한이 없던 한국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했다가 입사 후 이력서에 서울대 공대 중퇴라고 기재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사에서 강제 해직됐다가 입산 출가한 후에도 이런 사실을 밝히지 못한 것을 참회 한다”고 말했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다음은 일문일답▼

-자발적으로 고백한 것인가.

“어떤 기회를 찾고 있었다. 과거에 일부 신도들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었다. 그래서 다음에 또 기회를 보자고 했는데 사회적인 상황이 이렇게 돼가고 해서 제가 직접 (기자에게) 연락을 해서 모셨다.”

-학력이 포교에 도움이 됐는가.

“사실 학력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제가 포교의 뜻을 둔적이 없었다. 머리깍고 산에 들어갈 대 포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피신생활을 오래하다보니 너무 몸이 나빠져 신도집에서 약을 먹다 불교가 너무 위축돼있다고 생각해 포교를 시작했지만 이렇게까지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학력을 허위로 얘기했나.

“학력을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후배 기자들이 제가 한국일보 입사때 잘못쓴 이력서를 그대로 자꾸 써서 막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과감하게 용감하게 얘기했었어야하는데 무심하게 온 것이 큰 잘못이다.”

-일반신도들 중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텐데.

“모든 것은 부처님께 맡기겠다. 처음 스님이 될 때 세속의 모든 것을 버렸다. 언제든지 버릴 각오를 했고 스님 된 뒤 시체를 1000여구 이상 치웠다. 신도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으나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부들중에는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대의 경우 동창회 명부도 있고 해서 다 알게돼있다.”

-왜 고백을 못했나.

“제가 용기가 부족했고 어찌할지에 대한 판단을 못했다. 처음에 포교할 것인가 산중에 있을 것인가 판단을 못했고 또 능인선원이 이렇게 클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다.”

-고백할 기회가 많지 않았나.

“그것이 가져올 충격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도 그렇고해서 파장이 크더라도 과감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60이 넘어 또 다른 문제가 나오기 전에. 더 이상 가봐야 좋은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협박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많은데 능인선원의 경우 신도가 워낙 많아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신 분이 있고, 이미 제 상황을 아는 분들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것이 협박의 재료가 됐다. 꾸준히 괴로운 점들이 있어서 신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이 불거졌다. 이번 책을 내면서 앞으로 간다는 것은 마찰과 저항이 있음을 알았다. 이걸 털어내고 잠재워야겠다고, 나로 인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편안케 해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정진’이라는 책을 너무 과하게 홍보한 것은 아닌가.

“랜덤하우스는 세계적인 출판사다. 세계를 다니다보니 명함이 필요했다. 그래서 꾸준히 준비하고 출판사와 접촉했다. 박사공부를 마치고 자서전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책을 내려고 했는데...출판사측이 광고를 너무 상업적으로 해서 ‘출판사는 의례 그렇게 하는 모양이다’하고 생각했다. 자기들도 많이 팔리고 읽히면 좋은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본인의 학력을 확실히 밝혀 달라.

“1969년 서울고를 21회로 졸업했고, 98년에 방통대에 입학해 2002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동국대 선학대학원에 입학, 2005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은 2004년 입학해 2006년 봄 석사를 받았고, 박사과정은 2006년에 입학해 3학기를 마쳤다.”

-한국일보에서는 고졸 학력이 문제되지 않았나.

“저는 원래 문과였다. 한국일보의 특징은 학력철폐였다. 그냥 장난삼아 쳐봤는데 어떻게 합격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어렸을 때 미아리 근처에 살면서 인근 미군부대의 미군들과 생활하며 영어를 배웠다. 한국일보 입사 후 영어취재를 많이 했고, 코리아타임스에서 근무했다. 일간스포츠에도 있었고 주간부에서도 일했다. 그런데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하러 갔다가 내 운명이 바뀌었다. 한국일보에서 기자협회 간부도 했고 서울대 출신 운동권 친구들과 많이 교류를 했다.”

-출가과정은.

“사미계는 82년 도선사에서 받았다. 비구계는 시간이 없고 그래서 90년대에 통도사 청하스님한테 받았다. (비구계 없이 포교를 했냐는 질문에) 능인선원을 85년에 개원했는데 비구계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 포교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옆에 배석한 능인선원 간부들을 향해) 누가 대표로 한 말씀하시겠느냐.

(한 보살이 나서) “어떻게 보면 오늘이 있기까지 저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스님의 학력을 알고 있었으나 신도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는데 저희가 막았는지도 모른다. 그 파장 때문에 굳이 얘기를 해야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번 일은 스님의 책임이 있으나 저희에게 책임이 더 많다.”

(지광스님이 받아서)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기고 항상 버린다는 자세로 살았는데...커나오면서 삶과 죽음의 능선을 여러번 지났다. 마음이 담담하다. 변화나 동요는 별로 없다. 여여하게 마음 아파하고 신도님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참회하고 정진하겠다. 시간이 지나면 다 떠나야하는 존재들인데 나머지 생까지 열심히 살겠다.”

-향후 거취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들어와 스님이 됐는데 학력이 문제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어처구니없고 안타깝기도 하다. 얼마나 어떻게 버려야할지…이 우주가 다 부처님 나라인데 어디 간들 부처님 안 만나겠나. 만일 미국으로 간다면 ‘피신 한다’고 하지 않겠나. 이 일을 물려줄 사람을 찾기 위해 학교를 짓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께 맡기겠다.”

-국제신문의 회장으로 있지 않나.

“국제신문은 제가 회장을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제가 손을 떼면 제호를 내리고 문을 닫아야한다. 힘겹게 신문을 유지하고 있는데 좋은 분 나타나시면 언제든지 모시려 한다. 이번 일로 그분들에게 누가 될까봐 안타깝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늦게 온 한 간부가 나서서) “늦게왔는데 한 말씀 드리겠다. 능인선원의 신도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똘똘 뭉쳐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저를 아셨던 많은 분들에게 고백을 했어야하는데, 맘 아파하신다면 너무 죄송스럽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열심히 더욱 정진하겠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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