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석 정진숙(隱石 鄭鎭肅). 국내 출판계의 1세대로 꼽히는 정진숙(95·사진) 을유문화사 회장이 6일 펴낸 자서전에서 인생 철학을 밝힌 글이다. 평생 출판 한길을 걸어온 우리 시대의 거목임에도 책 제목은 간결했다. ‘출판인 정진숙.’
그의 저서는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한국 출판의 역사서다. 정 회장은 자서전에서 “을유해(1945년) 문화 사업을 통해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뜻으로 을유문화사를 세웠다”고 밝혔다. 1946년 첫 결과물인 ‘가정 글씨 체첩’에 대해서는 “사라진 언어문자를 복구하고 어린 세대가 한글을 터득하려면 꼭 만들어야 했던 시절의 아픔이 스며 있었다”고 회고했다.
1947년 10월 첫 권이 발행된 ‘조선말 큰 사전’은 ‘나랏말 큰 사전’이란 제목으로 한 장(章)을 할애할 만큼 애정이 깊었다. “일제에 조선어학회원들이 압수당한 원고를 1945년 9월 서울역 한국통운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자금 압박에 시달렸으나 ‘언젠가 해내야 할 일’이라 믿었다. 그들이 놓고 간 원고는 이후 10년에 걸쳐 모두 3558쪽 6권으로 완간됐다.”
자서전에는 1970년 발간한 ‘한국사’의 영문판 ‘더 히스토리 오브 코리아(The History of Korea)’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언급됐다. 정 회장은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고 안 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외에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아니 처음으로 알릴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이 책은 한국 역사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영문 한국사였다.
출판업을 시작할 당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이 해 준 말씀도 상세히 소개했다. “조풍연(언론인·수필가) 윤석중(아동문학가) 등이 함께 출판업을 권했으나 썩 내키질 않았다. 먼 친척 할아버지뻘 되던 위당이 찾으시더니 ‘문화유산을 되찾는 게 진짜 애국자다. 민족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 사업이야말로 출판인데 왜 그걸 안 하겠다는 거냐’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대통령 표창장(1968년)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 금관문화훈장(1997년) 등 영예를 얻었으나 그는 늘 출판인의 삶에 감사하고 헌신했다. “출판을 천직으로 삼은 것은 운명이고 축복이었다. 숱한 삶 가운데 책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정 회장은 최근에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옥으로 매일 오전 9시 출근하면서 출판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출판은 장사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책은 문화의 창조와 민족 역사 계승에 가장 중요한 견인차”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정 회장의 손자 정상준 을유문화사 상무는 “(할아버지께서는) 출판이 사회의 문화 발전을 이끈다는 믿음이 깊으셨다”며 “지난주 건강이 나빠져 입원 치료 중”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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