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역할론 이해하지만 책임론은…”

  • 입력 2007년 8월 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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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랍사태 보는 美 시각은

한국사회 일각 美비난 분위기 우려

탈레반 동향 등 현지정보 적극 제공

원칙 확고부동… 융통성 여지 적어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 문제를 일으킨 것은 미국도, 아프가니스탄도, 한국도 아닌 탈레반임을 잊지 말아 달라.”

리처드 바우처 미국 국무부 남·중앙아시아 담당 차관보는 2일 기자회견에서 네 차례나 이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모든 압력은 탈레반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이 “브리핑룸에 서서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 이외에 실제로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이는 한국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미국 책임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지도 충분했다.

인질 사태가 발생한 지 2주가 지나는 동안 공식적으로 미 행정부가 취한 행동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인질의 안전과 석방을 촉구해 온 것이 전부다.

그러나 외교소식통들은 실제론 한미 양국 간에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한 정보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고 전한다. 다만 원칙론에 들어가면 좁히기 힘든 견해차로 인해 잠재적 긴장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 협력 속 이견 엄존=니컬러스 번스 미 국무부 차관은 2일 한국 5당 대표의 방문을 받고 “미국은 인질들의 안전 확보를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소식통은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 간에 정보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미국 측이 아프간 현지 정보를 최대한 제공해 주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국방부는 아프간 주둔 미군사령부로부터 탈레반 동향 관련 정보를 전달받고 있으며 미 합참, 국방정보본부, 북미방공사령부, 중부사령부 등이 수집한 아프간 현지 정보가 한미연합사령부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군사작전에 관한 한 한국 정부의 방침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약속도 분명하다. 미 행정부는 아프간 정부에도 이 같은 방침을 강력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우처 차관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탈레반에 압력을 넣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들어 달라’는 거듭된 질문에 “우리가 말로 촉구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 아프간 사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일들, 그리고 잠재적 군사적 압력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군사작전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원론적 견지에서 모든 옵션을 거론한 것에 불과하다고 국무부 측은 설명했다.

하지만 ‘납치범들의 요구에 대한 양보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놓고 한국 정부로서는 미국이 융통성을 보여 주길 원하지만 미국의 논리가 워낙 확고해 서로 간에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만약 미국이 융통성을 발휘한다 해도 그 최대치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이탈리아인 피랍 때처럼 탈레반의 요구를 일부 들어줄 테니 양해해 달라’고 할 경우 눈을 감아 주는 정도일 것”이라며 “하지만 문제는 이번엔 카르자이 대통령이 그렇게 나올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지난번 풀어 준 탈레반 사령관이 자살폭탄 테러를 주도하고 있어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 된다는 설명이다.

▽‘미국 책임론은 이해하기 힘들다’=한 외교소식통은 “최근 손학규, 정동영 씨 등 여권 대선주자들이 주한 미대사관에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 면담을 요청했으나 대사가 휴가 중이어서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면담 목적이 ‘미국이 해결 열쇠를 쥐고 있음을 분명히 해서 미국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게 미국이 움직이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미국이 나선다 해도 이는 누구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밀리에, 매우 간접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국 5당 대표의 2일 워싱턴 방문도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아무런 면담 일정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벼락치기로 이뤄졌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등 행정부 주요 인사들은 모두 외국 출장 중이고 의회 주요 인사들도 부재중이었다.

미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심정이야 100% 이해되지만 마치 미국이 모든 열쇠를 갖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고 가는 것은 곤혹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 싱크탱크 연구원도 “미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미국 역할론’ ‘미국 지원론’은 그렇다 쳐도 ‘미국 책임론’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아가 한국의 여권 정치인들 사이에서 ‘미국이 자국민이 인질로 잡혔을 때는 납치범과 협상했다’는 공식 성명이 나오는 데 대해서도 미 행정부 관계자는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다. 대체 어떤 근거를 갖고 말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이 관계자는 일각에서 거론되는 ‘미국의 타협 사례들’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며 “미국이 납치범의 요구를 들어줬다면 인질들이 그렇게 오래 잡혀 있었겠느냐”고 강조했다.

테러리즘 및 중동문제 전문가인 해디 아므르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인질 석방과 관련한) 진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알기 어렵다”며 “비밀리에 협상을 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행정부가 납치범들과 협상을 한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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