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젊은 상상력의 샘이 되다

  • 입력 2007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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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의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세련되게 표현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월하정인’(위·부채 위에 그림 합성)과 혜원 풍속화의 분위기와 그림 내용을 재현한 연극 ‘그림 같은 시절’. 사진 제공 이다엔터테인먼트
조선시대 양반들의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세련되게 표현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월하정인’(위·부채 위에 그림 합성)과 혜원 풍속화의 분위기와 그림 내용을 재현한 연극 ‘그림 같은 시절’. 사진 제공 이다엔터테인먼트
2001년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라는 책이 출간됐다. 6년이 흐른 지금,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온 조선 사람들이 연극 무대 위로 올랐다. 혜원 신윤복(1758∼?)이 그린 풍속화의 분위기와 그림 내용을 모티브로 한 연극 ‘그림 같은 시절’(6월 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이 그것.

최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눈 내리는 모습의 동영상으로 재창작한 ‘신(新)세한도’가 선보였다. 한국국제아트페어에서도 전통 화조화(花鳥畵)에 새와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처리한 병풍 작품이 선보여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모두 옛 그림을 모티브로 삼고 옛 그림에서 상상력을 이끌어 내 새로운 예술을 창작하려는 시도이자 옛 그림의 다채로운 변주라고 할 수 있다.

○ 무대에 오른 혜원의 에로티시즘

어스름 초승달빛 아래, 담 모퉁이에 숨어 한 쌍의 남녀가 밀애를 나눈다. 쓰개치마를 쓴 젊은 여인, 초롱을 들고 허리춤을 뒤적이는 양반 총각. 그들의 얼굴엔 무언가를 갈망하는 애틋한 정이 넘쳐흐른다. 뽀얀 얼굴에 붉은색 입술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옥색 치마와 흰색 속바지, 자주색 신발, 여인의 속바지와 신발 코의 곡선에 힘입어 화면은 농염해진다. 조선 후기 양반들의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멋지게 표출한 혜원의 풍속화 ‘월하정인(月下情人·국보 제135호)’의 모습이다.

연극 ‘그림 같은 시절’엔 이 같은 관능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가마 타고 활쏘기 구경 가는 기생을 따라가 수작을 거는 한량 양반, 기생을 놓고 한판 드잡이를 벌이는 양반들, 순라군의 눈을 피해 심야 밀회를 즐기는 남녀, 생황을 만지작거리며 삶의 고단함을 달래 보는 기생 등 혜원 그림에 나타난 조선 후기의 도회 풍속을 그대로 재현해 실제처럼 느끼게 해 주는 연극이다.

연출가는 남녀의 애정 행각에 그치지 않고 두 쌍의 엇갈리는 사랑을 통해 ‘삶은 끝없는 떠남’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혜원 풍속화의 단순 재현이 아니라 옛 그림의 변주이자 새로운 창작임을 의미한다. 월요일 쉼. 문의 02-762-0010

○ 추사의 세한도에 눈이 펑펑

‘세한도’는 1844년 58세의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작품. 조선 선비의 기개와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최고의 문인화로 꼽힌다. 이 그림은 자신을 잊지 않고 먼 곳에서 책을 보내 준 제자 이상적의 정성에 감격해 그에게 그려 보낸 것이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이상적에 대한 그리움과 유배지의 고독을 이겨 내려는 자신의 강인한 의지를 표현했다.

작가 이이남은 여기에 눈 내리는 장면을 담아 ‘신세한도’라는 제목의 동영상물로 변주했다. 한두 송이 내리던 눈은 어느새 펑펑 쏟아져 천지간(天地間)이 온통 흰색으로 변한다.

색다른 ‘세한도’ 경험이다. 그 눈 덕분에 ‘신세한도’는 추사의 원작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고 부드러워졌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좀 더 젊은 감각에 어울리는 것일까.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나 정선의 산수화를 적극 활용하는 작가가 많아졌다”는 사비나미술관 황정인 큐레이터의 말처럼 옛 그림은 이 시대 예술의 중요한 상상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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