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살인의 추억

  • 입력 2007년 5월 1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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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 쏟아지는 빗속에서 용의자 박현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형사 박두만. 범인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현규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허탈감과 안타까움을 박 형사는 이런 난데없는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이 빛나는 대사는 배우 송강호의 애드리브였습니다).

실제 국내에서 발생한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 여러분은 영화 속 범인이 과연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정말 박현규일까요?

어쩌면 범인의 정체는 이 영화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가 지목한 ‘진짜 살인마’는 엽기적인 살인행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1980년대, 그 시대 자체였으니까 말이죠.

[1] 스토리 라인

1986년 경기도의 한 농촌마을.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된 젊은 여성들의 시체가 잇따라 발견됩니다. 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동네 청년 백광호를 용의자로 붙잡아 자백을 강요하지만 진범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죠.

서울에서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내려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서 형사. 사건 자료를 검토한 그는 비 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성들을 상대로 사건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박현규(박해일)라는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사건이 발생한 밤마다 라디오 방송국에 ‘우울한 편지’라는 노래를 틀어 달라고 엽서를 보냈던 장본인이죠.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체액의 DNA 분석을 미국에 의뢰한 수사팀은 분석 결과가 나오기만을 노심초사 기다립니다. 그런데 수사팀을 비웃기라도 하듯, 살인은 또다시 일어납니다.

이성을 잃은 서 형사는 박현규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자백을 강요합니다. 때마침 DNA 분석결과를 담은 서류가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박현규와 범인의 DNA가 서로 다른 것으로 밝혀진 겁니다.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집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범의 뒤를 쫓는 모양새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 전하고자 했던 건 특정한 살인사건이 아닙니다. 그러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입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전이면 꼭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애애애앵∼’하며 고막을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 사이렌과 함께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국민 여러분, 여기는 민방위 재난통제본부입니다. 훈련 공습경보를 발령 합니다”라는 급박한 목소리. 온 세상에 불이 꺼지면서 등화관제에 들어가고, 사람들은 일제히 책상 밑으로 대피합니다.

이는 1980년대 북한의 공습에 대비해 이뤄진 민방위 훈련을 옮긴 장면입니다. ‘북한의 공습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벌어진 일이지만, 우리는 이런 분주한 모습 뒤에 드리워진 암울한 그림자를 읽어내야 합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하던 일을 일제히 멈추고 내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면서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세상은 순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한다? 공포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이런 1980년대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한 우리의 자화상입니까.

이런 무거운 시대의 공기는 영화 속 연쇄살인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국민의 일사불란한 행동이 요구되는 전체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들은 자유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입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국가는 경찰을 모두 시위현장에 투입하게 됩니다. 결국 치안의 공백상태가 된 농촌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연쇄살인, 바로 여기에 영화는 초점을 맞춥니다.

살인이 예상되는 날, 특별수사본부 반장(송재호)이 전투경찰을 지원해 달라고 상부에 요청하지만 “전경들이 시위 진압에 다 나가고 없다”는 답변만을 들은 채 자포자기하는 장면도 이런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 공권력이 온통 정권의 안위를 위해 동원되는 동안, 죄 없는 국민들이 연쇄살인범에게 무기력하게 생명을 빼앗기는 상황….

공권력의 직무유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박 형사와 조 형사(김뢰하)로 대표되는 국가 공권력은 공포에 떠는 국민을 위로하기는커녕 합법을 가장한 폭력을 일삼습니다. 증거를 조작하고 생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일도 다반사죠.

그렇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한 농촌 마을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1980년대에 국가가 보여준 가학적이고도 폭력적인 광기(狂氣)를 보여주고자 했던 겁니다. 결국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른 진범은 ‘억압적인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이런 국가가 만들어낸 질식할 듯한 시대 자체였다고 영화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영화의 이런 핵심 메시지를 염두에 두면서 영화 속 등장인물과 소품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추론해 봅시다.

우선 말끝마다 “향숙이, 향숙이” 하는 백광호란 인물을 살펴볼까요. 그는 덜 떨어진 인물로 묘사되지만, 우리는 그를 바보 같다고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백광호야말로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르니까요.

형사들로부터 부당하게 두드려 맞으면서도 변변한 자기 변명 하나 늘어놓질 못하는 백광호. 결국 철로 위에 서서 자살 아닌 자살을 선택하는 백광호의 운명은 당시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짓눌려 입도 뻥끗 못한 채 자유를 포기해야 했던 무지렁이 민초들의 안타까운 운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 형사의 ‘검은 군화’는 광포한 국가권력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용의자들을 구타할 때 조 형사가 즐겨 신는 군화는 1980년대를 장악했던 군사정권에 대한 은유임과 동시에 비틀린 국가 공권력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 것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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