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백형찬]어느 여자 영화학도의 눈물

  • 입력 2006년 2월 1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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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라는 수업 시간의 일이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예술가로서 느끼는 긍지와 보람을 인터뷰해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영화과의 한 여학생 차례였다. 평소 수업에 적극적인 학생이라 발표할 내용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그 학생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다들 당황했다.

그 학생이 찾아간 사람은 영화제작 현장에서 촬영을 돕고 있던 선배였다. 그 선배의 꿈은 정일성 촬영감독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거운 촬영 기자재를 들고 밤낮없이 현장을 쫓아다녔다. 몸이 아파도 배가 고파도 꾹 참았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현장을 뛰어다닌 지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도 촬영은커녕 카메라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극빈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들짐승(?)같이 생활하는 불쌍한 선배를 떠올리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던 것이다. 발표를 하며 눈물을 보였으니 그 선배를 보면서는 얼마나 울었을까?

영화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폭포에서 여인이 떨어지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형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신해 봤지만 아무래도 생동감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어서 연기자는 물론 스턴트맨까지도 벌벌 떨며 무서워했다.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이때 카메라를 잡고 있던 촬영감독이 여자 한복으로 갈아입고 폭포 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 한 장면을 찍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 촬영감독은 한 작품 한 작품에 혼을 담아 찍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가 촬영한 영화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작품들은 한국영화 가운데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초록물고기’ ‘하얀 전쟁’ 등이다. 그 촬영감독이 바로 고 유영길 씨다. 훌륭한 영화는 이렇듯 스태프의 목숨을 건 승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배우 황정민은 한 영화상 시상식의 수상 소감에서 “60여 명의 스태프가 차려 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데,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나만 받는다”며 스태프에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함께 전했다. 최근 그는 광고를 찍고 받은 수익금 3000만 원을 형편이 어려운 스태프에 나눠 줬다.

영화 ‘왕의 남자’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제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힘들게 사는 스태프가 많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는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기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세상이 돼서는 안 된다. 스태프도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

문화 선진국에서는 영화의 주인공은 물론이고 어떤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었는가에도 충분히 관심을 보인다. 감독 제작 촬영 조명 편집 미술 의상 등의 스태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카데미상이 총 25개 부문인 데 비해 연기는 고작 4개 부문에 불과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영화는 실제로 이들이 만들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스크린쿼터 축소에 따른 한국 영화산업 진흥을 위해 앞으로 400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원금 명세에는 ‘현장 영화 인력 처우 개선’이 들어 있다. 얼마나 반갑고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참으로 귀하게 확보한 지원금이다. 이 돈은 결코 헛되이 쓰여선 안 된다. 많은 부분이 현장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제 다시는 수업 시간에 강의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영화과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 교육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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