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신뢰의 언어

  • 입력 2006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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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강연은 무겁고, 지루하고, 길었다.” 1996년 12월 5일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역사적 연설을 참석자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내려앉는 눈꺼풀과 씨름했던 사람들은 다음 날 조간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 FRB 의장이 증시의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했다.” 몇 해 뒤의 주식 거품 붕괴를 경고해 수조 달러를 요동치게 한 발언을 듣고도 몰랐던 거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신어(Newspeak)가 있듯 그린스펀에게는 ‘Fed Speak’가 있다. 에둘러서 말해 듣는 이를 헷갈리게 하는 어법이다. 같은 말을 놓고 뉴욕타임스는 ‘금리 인하 없을 듯’, 워싱턴포스트는 ‘금리 인하 시사’라고 보도하기도 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한다. 그는 “FRB 의장이 되면서 대단히 조리 없이(with great incoherence) 웅얼거리는 것을 배웠다”며 “여러분이 내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면 틀림없이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세계경제 대통령’의 화법은 그리스 신전의 신탁(神託)처럼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시장(市場)의 과민 반응을 줄이고 정책 결정의 폭을 넓힘으로써 금융시장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위력에 따라 세계 경제에 미칠 엄청난 영향력도 조절할 수 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적었어도 시장은 그린스펀을 믿었다. 특히 인플레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념은 그의 무기였다. 미국이 무역과 재정의 쌍둥이 적자 속에서도 달러 가치를 유지하는 것 역시 그린스펀에 대한 신뢰로 풀이된다.

▷그린스펀의 뒤를 이어받는 벤 버냉키 새 의장은 정책은 잇되 어법은 명료하게 구사할 것 같다. 말이야 모호하든 안 하든, 중요한 건 시장과 경제 주체에 일관된 메시지와 확신을 주는 일이다.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더는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실언으로 1조 원의 환율방어 비용을 날리기도 했다. 하긴 말로써 말이 많은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어디 한둘일까마는.

김 순 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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