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7년 ‘할리우드10’ 의회 증언

  • 입력 2005년 11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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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매혹의 대상이다. 1900년대 초 대형 영화사들이 들어서면서 미국 영화의 메카로 성장한 곳. 여기에는 매력적인 스타들이 있고 스크린을 수놓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가득하다. 말 그대로 ‘꿈의 공장’이다.

그러나 화려한 할리우드 역사에도 ‘어둠’의 시기는 있었다. 1940, 50년대 ‘매카시 광풍(狂風)’이 몰아친 것. 증거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며 밀고하는 불신의 그늘이 드리웠다. 존 웨인, 게리 쿠퍼, 로버트 테일러 등 당대의 스타들도 이 행렬에 앞장섰다.

당시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국 사회에는 오늘날보다 훨씬 많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상당수 미국인이 공산주의에 동조하게 된 것.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는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각 분야에서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섰다.

1947년 11월 24일 공산주의자로 이름이 오르내린 영화인 10명이 처음으로 의회 청문회에 불려 나왔다. ‘할리우드 10’이라고 불린 이들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의회 모독 혐의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미국영화협회(MPAA)는 1950년대 중반까지 300명이 넘는 배우, 감독, 작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연극 무대로 옮겨 갔다. 찰리 채플린은 영국 국적을 취득했고 1972년이 돼서야 미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일부 작가는 가명을 쓰며 계속 할리우드에 남아 활동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콰이 강의 다리’ 등 영화사에 남을 빛나는 명작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제 블랙리스트 영화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평가는 달라졌다. ‘마녀사냥’을 이겨 낸 이들은 할리우드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료를 밀고한 이들에게는 ‘배신자’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1999년 ‘워터프런트’ ‘에덴의 동쪽’의 명감독 엘리아 카잔이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받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많은 영화인은 기립박수라는 관례를 깨고 굳은 얼굴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행사장 밖에서는 그의 수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훗날 역사가 동료를 밀고한 그에게 내리는 냉엄한 심판이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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