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시인 김광균 사망

  • 입력 2005년 11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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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瓦斯燈)’의 시인 김광균.

그는 우리 현대시사(詩史)의 건널목이었다. 우리 현대시에 이미지즘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였다. ‘시라고 불리는 음악’을 회화적 색채로 짙게 물들였다. “1930년대 우리 시의 현대적 감수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김기림)이었다. 그를 만나고서야 우리는 귀로 듣는 종소리를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로 보게 되었다.

고흐의 ‘수차(水車)가 있는 가교’를 처음 접하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는 시인. 그는 회화에 몰두했다. 소리를 혐오했다. 그의 ‘외인촌(外人村)’에선 아예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의 시계는 열 시가 되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다만 ‘여윈 손길을 저어’ 시각을 가리킬 뿐.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정신의 풍경! 농경생활이 아니라 도시생활! 음악이 아니라 회화!” 그게 ‘현대를 뚫고 나갈 호흡’이었다. 도시적 감각의 시각적 이미지야말로 그가 평생 간직한 시적 본령이었다.

그는 “시는 항시 그 시대의 거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현실은 ‘먼 풍경’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는 시대의 거울보다는 ‘내면의 거울’을 중시했다. 사라지는 것, 희미해져 가는 것, 여위어 가는 것을 마주하며 그의 시는 과거의 시간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시가 이렇듯 한없이 무른 속살을 가진 애상적인 시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우리 모더니즘이 아류로 전락한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문명을 감수(感受)하는 데 그쳤을 뿐, 이것을 극복하는 노력에 무력하였으니 그게 모더니즘의 패색을 가져온 원인이다.” 그의 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광복기에 그는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성공한 사업가로 남았다. “현대시의 ‘맏형’ 격인 T S 엘리엇이 은행원으로서도 훌륭했다더니 김광균이야말로 한국의 엘리엇이 아닌가?”(구상)

1989년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임진화’를 펴내면서 “죽은 후에도 시인으로 불러 달라”고 당부했으나 그는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라고 자주 탄식하곤 했다.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항시 곤두박질해온 생활의 노래/…먹고 산다는 것./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魯迅’)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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