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빈 前총장 “姜교수 구속은 소신… 꼼수 택할수 없었다”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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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처음 이뤄진 법무부 장관의 검찰 수사지휘권 발동과 이에 맞선 검찰총장의 사표, 검찰의 집단 반발 움직임과 새 검찰총장 내정…. 숨 가쁘게 이어진 파문의 한가운데 있던 김종빈(金鍾彬) 전 검찰총장은 지난달 17일 퇴임식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칩거해 왔다. 그런 김 전 총장을 지난달 31일 밤 어렵게 만났다. 김 전 총장은 수사지휘권 파동에 대해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며 말하려 하지 않았으나 “검찰 후배들과 국민이 알 것은 알아야 한다”는 말에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지금 심경은….

“눈앞의 안개가 걷히니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홀가분하다. 퇴임 이후 몸무게가 1kg 늘었는데 이것도 마음 상태를 보여 주는 것 아닌가.”

―사퇴 이후 어떻게 지냈나.

“아내와 함께 지리산과 강원도 등의 사찰을 다녔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이 알아보고 ‘정말 고생했다’고 악수를 청하더라. 한 중년 아주머니는 ‘요즘처럼 막말이 판치는 세상에 점잖게 말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하더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난 노동조합 시위대, 길을 걷다 만난 젊은이들이 ‘쉽지 않은 결단을 했다’고 인사를 했다. 법정 스님도 ‘현명한 결단을 했다’고 하시더라. 이런 것이 국민의 목소리가 아닐까 한다.”

―청와대는 사표 제출에 대해 “(검찰총장이) 사소한 일로 자리를 거는 것은 신중하지 않다”고 했는데….

“만 27년간 몸담았던 공직을 떠나는데 신중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나. 심사숙고해서 결정했다. 강정구(姜禎求) 동국대 교수 사안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왜 강 교수의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나.

“우리 사회는 늘 진보가 보수를 리드한다. 하지만 검찰은 법을 준수하는 기관이고, 따라서 검찰은 ‘현재’의 상황에서 사회적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분단 상황이고 헌법의 기본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다. 강 교수의 발언과 행동은 명백히 법에 위배되는 것이고 구속이 불가피한 중요한 사안이다. 그 신념에는 변화가 없다.”

―오랫동안 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을 설득했다고 했는데….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란 말로 시작했다. 가령 통일부는 통일부의 방식대로 전향적 사고를 발휘할 수 있겠지만 검찰은 검찰 본연의 역할이 있다. 어느 한쪽이 너무 급하게 진보로 가면 다른 쪽은 브레이크를 걸어야만 국가가 운영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검찰총장으로서 법과 원칙, 그리고 일선 수사 검사들의 의견에 따라 구속 수사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도 충분히 설명했다.”

―12일 오후 6시 30분 지휘권 발동 이후 14일 오후 5시 30분 사표 제출까지 만 47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을 것 같다.

“수사지휘권 발동 하루 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12일 아침 마음을 비우고 사표를 써 집무실 책상에 넣어 놓았다. 지휘권 발동 직후 사표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바로 던지는 것은 ‘항명’으로 비칠 것 같아 잠시 시간을 가졌다. 일에 있어서 고민을 할 때마다 법철학 책을 읽곤 하는데 거기엔 ’법의 목적은 안정성에 있다‘고 돼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총장이 사퇴하지 말고 대신 검찰이 시간을 갖고 강 교수 건을 재수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의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꼼수’를 써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재수사를 한다면 ‘시간을 벌기 위해 수를 쓴다’며 국민이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검찰은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과 정도를 택해야 한다.”

―솔직히 중도 사퇴는 아쉽지 않은가.

“우리 속담에 ‘오뉴월 땡볕도 그만 쬐라면 서운하다’란 얘기가 있다. 2년간의 임기가 보장된 총장직을 중도에 그만두고 싶었겠는가. 또 나름의 목표도 있었다. 하지만 검찰의 최고 가치인 중립성이 흔들려서는 총장직을 유지할 수 없다.”

―사표가 수리된 이후 천 장관은 TV 토론회를 비롯한 언론매체에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수사권을 발동했다”란 얘기를 했다.

“장관은 장관의 입장이, 총장은 총장의 입장이 있다. 장관의 말과 행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정치권 등 일부에서는 사퇴하는 모습 보고 “대가 약한 사람인줄 알았는데…”란 얘기가 나왔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대화와 설득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의견이 상충될 때는 성의와 논리로 설득한다. 그러나 법과 원칙에 비춰 옳지 않다면 따를 수 없다. 총장 재임 6개월 동안 청와대나 정치권의 요구를 수용한 적은 없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관철하는 특유의 고집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의 고집과 신념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어머니는 검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무학(無學)인 가난한 농부의 아내였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어린아이 때 장마철에 젖은 장작으로 인해 질어진 밥을 투정한 적이 있다. 회초리를 든 어머니를 피해 사오 리가 넘는 이웃 동네로 줄행랑을 쳤다. 어머니는 기어코 회초리로 때린 뒤에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올해 초 검찰총장 인선 때 호남 출신이란 점 등이 고려돼 혜택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초중고교 시절 줄곧 반장과 학생회장을 하고 대학 때도 학과 대표를 맡았지만 검사가 된 이후 정치판을 기웃거린 적이 없다. 단언컨대 검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능력을 넘어서는 혜택을 누려 본 적이 없다.”

―좌우명을 ‘재산과 벼슬을 탐하지 말라’라고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공직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좌우명이다. 벼슬을 탐했다면 이번 사건의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번 일을 겪으며 가장 힘이 됐던 사람은….

“아내다. 만 27년간의 검사생활을 접는 퇴임식 당일 아침에도 ‘잘 다녀오라’고 하더라. 늘 내 선택을 지지하고 믿어 줬다.”

―앞으로의 계획은….

“변호사 사무실을 내려 한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소외받는 사람이 많다. 또 기회가 된다면 교단에 서고 싶다. 광주고검 차장 때 조선대에서 6개월간 헌법을 강의한 적이 있다. 최근 제주대에서 특별강연 요청이 와 수락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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