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882년 흥선대원군 청나라 유폐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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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고 고독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청나라에 유폐됐던 3년간(1882∼1885년)일 것이다.

그가 조선에 주둔 중인 청의 군대에 납치돼 중국 톈진(天津)으로 압송된 것은 1882년 8월 27일. 임오군란 발발에 힘입어 9년 동안의 은거를 마치고 다시 정권을 잡은 지 불과 34일 만이었다.

청군이 내건 납치 이유는 대원군이 군란의 책임자라는 것이었다. 당시 고종은 이 사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로서의 대원군이 아니라 정적(政敵)으로서의 대원군이 제거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톈진에서의 유폐 생활은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황달을 앓는 등 육체적인 시련도 겪어야 했다. 대원군은 그곳에서 난초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난을 치며 한을 삭이고, 정치적 시련을 예술로 극복하려 했다.

이 시기 대원군의 묵란(墨蘭)엔 그의 정치적 야망과 좌절, 분노가 그대로 묻어난다. 그의 묵란은 섬세하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하다. 난초 잎은 중간 중간 섬세한 각을 이루며 반전을 거듭한다. 위로 올라가면서 갑자기 가늘어졌다가 다시 굵어진다.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 나간다.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인생 그 자체다.

중국에서 그의 묵란은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석란(石蘭)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길쭉한 화폭 한편에 돌을 그린 뒤 그 틈을 뚫고 나오는 날렵하고 예리한 난초를 그려 넣었다. 흥선대원군 묵란의 전형은 그렇게 형성됐다. 원래 난을 잘 쳤던 흥선대원군이기에 중국에서도 그의 난초는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묵란을 그리며 힘겨운 유폐 생활을 견뎌낸 흥선대원군은 1885년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민비를 견제할 사람은 흥선대원군밖에 없다는 청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납치됐다 청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온 흥선대원군. 귀국 후에도 그는 운현궁에서 10년 동안이나 은거해야 했다. 계속되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현궁에서도 열심히 묵란을 그렸다.

묵란과 함께했던 흥선대원군의 삶.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엔 이견이 있겠지만 그는 분명 위대한 예술가였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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