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97년 대선후보 조사 안했으면 좋겠다” 발언 왜?

  • 입력 2005년 8월 25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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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24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도청 테이프 사건이 1997년 대선 후보에 대한 수사로 번지는 것에 반대하고 나서 정치적 논란이 일고 있다.

노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25일)을 맞은 것을 계기로 청와대 출입기자 180여 명을 영빈관으로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한 발언이었다.

▽준비된 발언=노 대통령은 식사를 마친 뒤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메모를 꺼내 들어 1997년 대선 자금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찬장에 동석했던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도 노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던 듯했다. 그는 ‘배경이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작심하고 한 말씀 같다”고만 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이회창(李會昌) 후보나 나나 간이 작은 사람이라서 그 이전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수준에서 (대선 자금의) 구조적 요소들은 대부분 다 나왔다”고 말을 꺼냈다.

이어 “이 후보는 1997년 세풍(稅風) 사건으로 조사받고, 지난번에도(2002년 대선 자금 수사) 조사를 받았는데 또 조사하면 대통령인 내가 너무 야박해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노 대통령은 “정경유착 문제라든지 구조적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사실일 경우 한 100가지하면 다 나올 것을 갖고 1000가지 한다고 국력을 낭비하고 일일이 지지고 볶고 할 일은 아니다. 10개만 딱 조사해서 1000가지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으면 그 수준에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된다”는 말도 했다.

또 “2002년 것은 아직 살아있다 치고 1997년 것 갖고 왕년의 후보들을 다시 불러내라는 얘기는 안 하는 게 우리 사회의 상식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오늘 살아 있는, 의미가 있는 것들만 해도 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 넘어갈 것은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왜 이런 발언 했나=노 대통령의 발언은 직접적으로는 전날 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의 발언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

천 장관은 국회 예결위에서 민주노동당 노회찬(魯會燦) 의원이 1997년 대선 당시 삼성 대선 자금 문제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자 “돈을 조성하는 데 있어 배임이나 횡령이 있을 수 있다. 당시 수사 상황이 어땠는지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삼성의 대선 자금 문제를 ‘불법 증거’인 미림팀 도청 테이프가 아닌, 과거 ‘세풍 사건’을 재검토하는 식의 우회로를 통해 수사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1997년 삼성 자금을 뒤지다 보면 이 후보는 물론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 측에 건네진 자금의 실상도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은 DJ와 이 후보, 삼성 측 모두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 후보가 수사 대상이 되면 야당 탄압 얘기가 나올 수 있고 DJ 대선 자금으로까지 번지면 여권이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미 DJ 정부 시절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호남 민심의 이반에 직면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1997년의 대선 자금 문제를 다시 들춰내는 게 득 될 게 없는 사안인 것이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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