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5-6共비화 회고록]<中>5공 청산-3당 합당 전후

  • 입력 2005년 8월 15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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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朴哲彦)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의 주요 내용을 13일자(6면)에 이어 계속 싣는다. 이 회고록은 박 전 의원의 주관적 서술임을 거듭 밝혀 둔다.》

▽전두환(全斗煥),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죽여라”=1988년 5공을 향한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1월 8일 연희동 자택에서 만난 전 전(前) 대통령은 분노했다. “내가 무리해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는데 사과하고 재산 헌납하고 낙향하라고 하는 것은 죽어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한 짓이다.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는 나도 싹 쓸어버리겠어. 나도 양심선언 하겠어. 김대중(金大中)이가 잡든, 김영삼(金泳三)이가 잡든…”이라며 “형님(전기환 씨)이나 처남(이창석 씨)까지 잡아넣겠다는 것은…. 노태우가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하면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둘 사이가 원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흘 뒤 전 전 대통령은 나를 연희동으로 불러 “대선 때 정치자금은 25명으로부터 1010억 원을 걷었으나 실제 (쓴) 자금은 두 배 이상 들었다. 약속한 금액과 실제 헌금 명단이 있다. 그 이전에는 따로 받은 것이 없다”고 했다.

5공 청산 요구에 밀린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1988년 11월 23일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떠나 백담사로 향했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 측에서 가하는 청산 압력에 대해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죽이라”며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으나 결국 은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전 전 대통령은 또 노 대통령과 통화(11월 2일)했다며 그 내용을 전했다. “이원조(李源祚·전 은행감독원장)는 내가 많이 걷고 적게 내놓은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A 그룹 같은 데는 50억 원을 약속하고도 10억 원만 냈다. 확인해 봐라. 삼족(三族)을 멸하는 식으로 하니 견딜 수가 없다.”

11월 15일 노 대통령이 전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알려줬다.

“최병렬(崔秉烈)이 ‘1000억 원을 인계해 주고 나머지가 있을 테니 내놓으라’고 한다는데 환장할 일이다”(전), “살신성인하면 뒤는 내가 보장한다. 나를 믿으라”(노), “나중에 만날 때 술이나 한잔 주라”(전).

▽“DJ는 믿을 수 없다”, “YS는 늙었다”=1988년 9월 21일 상도동 자택에서 나는 YS와 독대했다. YS는 “노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며 “DJ는 믿을 수 없고 좌경화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1989년 1월 17일 연두기자회견 후 나를 불러 “DJ를 만나 ‘영호남이 합쳐지면 당신은 영웅이 된다. 극단적으로 나가면 지역 당수에 불과하다’고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DJ와 만나 3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DJ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서 지금도 도청을 하고 편지를 검열하고 있다. 안기부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내가 YS보다 건강하다. YS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 늙는 것 같다. 내가 만 65세지만 대통령을 한 텀(임기)은 할 수 있는 건강이다”라고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1990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왼쪽),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는 “특정 지역을 고립시키는 반역사적 야합”이라고 맹비난하고 나서 정국이 급속히 냉각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간평가 1500억 원 모금 시도=1989년 3월 10일 대그룹 모 회장이 급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3월 8일 5대 그룹 총수를 비롯해 재계 인사 8명이 청와대 만찬 행사를 마치고 살롱 ‘반줄’로 옮겨 술을 한잔 했다. 그 자리에서 ‘안기부 주관으로 롯데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 비용으로) 1500억 원을 모금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내게 귀띔해 줬다.

다음 날 이를 보고하니 노 대통령은 “자네가 어떻게 그 일을 아느냐”며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 공약은 3당(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합당과 함께 물 건너갔다.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방북은 DJ 작품 의심?”=1989년 3월 25일 문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YS 측의 황병태(黃秉泰) 의원은 “문 목사가 DJ를 만나고 전격적으로 방북을 결정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황 의원은 “3월 20일 YS는 출타하려다 비서실에 대기 중인 유원호(당시 통일민주당 당원으로,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사람)에게서 ‘문 목사가 방북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알았다’고만 답변했다”며 YS와의 무관함을 거듭 강조했다. 김덕룡(金德龍) 의원도 “YS는 그 얘기를 건성으로 듣고는 혹시 DJ 측의 공작이 아닌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JP는 체면만 세워주는 방향으로 해라”=1989년 3월 4일 노 대통령은 내게 “만약 YS가 차기 대권에 관심이 있으면 여당으로 들어와 기반을 닦고 대권을 쥘 길을 뚫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이미 노 대통령에게서 “신격호(辛格浩) 롯데그룹 회장과 YS는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다. 신 회장을 자주 만나 올바른 정보도 파악하고 YS에게 합당을 권유하라고 부탁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7월 18일 롯데호텔 일식당에서 만난 신 회장은 “YS의 합당 의사는 분명하다. 그 전제로 정호용(鄭鎬溶) 이원조의 용퇴를 주장하고 있다”며 “내각제 개헌을 통해 YS가 수상(총리), JP가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이 해야 한다”고 했다.

3당 합당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9월 27일 박준규(朴浚圭) 민정당 대표 등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2년 정도는 양 김씨에게 수상이 될 찬스를 주고 그 다음에 순수 민간인에게 국정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또 10월 3일 박 대표 등과의 오찬에서 “JP는 꼭 집권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체면만 세워 주는 방향으로 해라. YS는 꼭 집권하겠다고 하는데 ‘시간을 끌면 너는 아무것도 안 된다. 불안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JP와 손잡을 수밖에 없다. JP에게 다 주겠다. 그러면 YS 너는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승부수를 던질 시점이다. YS가 DJ와 손잡을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1989년 10월 15일 상도동 자택에서 YS를 만났다. 그는 민주당 내 야권통합 움직임이 신경 쓰이는지 “최형우(崔炯佑) 장석화(張石和)는 몹쓸 인간이다. 두 사람 외에는 반대 세력이 없고 노무현 의원은 당을 떠나도 무관하다”고 잘라 말했다.

▽노(老) 총리의 눈물=1989년 10월 21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전날 귀국한 노 대통령이 청와대 고위당정회의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귀로에 신문을 보니 3김씨가 정권 퇴진 운운하며 악수하는 무의미한 사진이 톱이었다. 대통령 할 생각이 없어지더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에 강영훈(姜英勳) 총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국에서 밤잠 설치며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데 송구스럽다”고 했고, 박 대표도 울먹이며 “연말까지 당이 책임지고 5공문제를 종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 朴씨 회고록 관련 당사자 반응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 내용이 보도되자 회고록에 거론된 당사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박 전 의원이 3당 합당을 전후해 40억 원을 전달했다고 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 측근은 “노태우 정권 시절부터 박 전 의원은 입만 열면 YS를 음해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일 아니냐”며 “YS가 회고록에 대한 보고는 받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YS의 또 다른 측근은 “박 전 의원은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YS를 원망했지만 정작 YS는 대통령 재임 중 광복절 사면대상에 박 전 의원이 빠져 있자 직접 ‘박철언을 넣어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5공 시절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한나라당 김용갑(金容甲) 의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6년 친위 쿠데타를 생각했다는 회고록 내용에 대해 “당시 시국 걱정을 하다가 이런저런 말이 나왔을 수는 있겠지만 친위 쿠데타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며 사실관계에 의문을 제기했다.

김 의원은 “5공 때 박 전 의원은 황태자도 아니었고 중요한 결정 라인에도 없었다”며 “회고록에도 자기의 잘못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못 믿을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전 전 대통령 측 이양우(李亮雨) 변호사는 “전 전 대통령이 내용을 알고 있는지, 무슨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라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5공 시절 미국에 갈 때 전 전 대통령이 DJ에게 7만∼8만 달러를 주었다는 회고록 내용에 대해 DJ 측 최경환(崔敬煥) 비서관은 “회고록에 대한 DJ의 언급은 일절 없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요직에 있었던 한 인사는 “박 전 의원은 자기중심의 주관적 판단을 많이 한 것 같다”며 “월계수회를 관리할 때 돈 문제로 물의를 빚어 노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내용은 보이지 않더라”고 지적했다.

한편 검사 시절 ‘슬롯머신’ 사건으로 박 전 의원을 구속했던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의원은 “그는 자기과시가 심한 사람이어서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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