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6년 연극인 이해랑 출생

  • 입력 2005년 7월 22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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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애를 태우면서 공연을 치르고 나면 연극은 명멸하던 스포트라이트의 불빛과 같이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견딜 수 없는 정적만이 썰물처럼 가슴을 파고 스며든다. 관객과 더불어 짧은 순간 속에서 인생의 영원한 꿈을 그리다가 사라지는 허무하기 그지없는 연극을 부둥켜안고….”

한국 연극을 고급예술로 끌어올려 세계 연극의 대열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연극인 이해랑(李海浪·1916∼1989)은 생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가난한 시절 스스로 연극이란 험난한 길을 택해 고독하게 그 여정을 걸어간 인물이었다.

유민영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장은 1999년에 펴낸 ‘이해랑 평전’에서 그는 한평생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운명으로 연극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해랑은 군사정권의 강요에 못 이겨 여당 국회의원(8, 9대)을 두 번이나 했지만 주위에 정치 얘기는 꺼내지도 않을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대신 그는 술자리에서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연극하는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자주했다. 저녁이면 밥도 마다하고 맥주와 몇 가지 마른안주로 자정까지 지인들과 어울려 즐겁게 술을 마셨다. 특히 연극인들은 취중에 그가 자연스럽게 던지는 연기 연출론에 매료됐다. 그는 많은 독서와 무대체험을 통해 터득한 연극론을 쉽게 풀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1916년 7월 22일 조선왕조 왕가의 방계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가 철종의 4촌이고 조부는 왕실의 의전장이었다. 그러나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났음에도 네 살 때 모친을 여의는 바람에 불우한 청소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김동원 등과 함께 연기자로 활약했으며 졸업 이듬해인 1941년 귀국해 현대극장 창립동인 배우로 활약했다. 그 후 ‘밤으로의 긴 여로’(1962년), ‘오델로’(1964년) 등에서 배우로서의 원숙미를 보여준 뒤 연출로 방향을 바꿨다.

배우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 배우를 잘 이해한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속된 배우는 연극현장의 인생을 표현하고, 진실한 배우는 연극 속에 또 하나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인생을 표현한다”는 독창적 배우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런 배우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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