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16>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22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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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계포의 재촉에 밤낮없이 달려온 초군 본진(本陣)이 형양에 이른 것은 패왕 항우가 이끄는 별대(別隊)가 그곳에 이른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러나 패왕은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먼 길 오느라 고단할 테니 본대는 하루를 쉬게 하라. 내일 성을 칠 채비는 과인과 종리매가 이끌고 온 군사들만으로도 넉넉하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공성할 채비를 갖춰 나갔다. 성벽에 걸칠 구름사다리를 엮고 밧줄을 꼬게 하는가 하면 밧줄 끝에 달 갈고리를 벼렸다. 성벽을 기어오를 군사들의 머리 위를 막아줄 방패를 만들고 쇠뇌의 살과 화살도 그 어느 때보다 넉넉히 장만했다.

계포가 꾀를 내어 전에 없던 설비도 갖추었다. 성밖 백성들을 시켜 만든 흙을 채운 자루를 몇 만 개나 성벽 가까이 쌓아올린 뒤에 그 위에다 통나무로 망루를 짜 올린 일이 그랬다. 성벽 위를 내려볼 수 있을 만한 높이였는데, 망대 앞은 두툼한 널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런 망루가 형양 성 밖 여러 곳에 솟아올랐으나, 싸움이 벌어질 때까지는 아무도 그 쓰임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갑옷투구로 몸을 감싸고 말 위에 오른 패왕은 문루 앞으로 나가 주가와 종공을 불러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달래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주가와 종공은 패왕에게 변변히 말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놈 항적아. 네 무슨 되잖은 수작으로 한나라의 귀신이 되기로 한 우리 귀를 더럽히려느냐? 듣지 않아도 알만하니 이거나 받아라. 이게 우리 대답이니라.”

문루 위에서 얼굴을 내민 주가가 그렇게 소리치며 화살을 먹여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패왕이 창대로 화살을 쳐내려 하였으나 거리가 멀지 않아서였던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살촉이 투구를 치는 쨍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패왕 발밑으로 떨어졌다. 성난 패왕이 말을 뒤로 빼며 주가를 올려보고 소리쳤다.

“너희가 정녕 죽기로 작정하였구나. 너희 대답이 그러하다면 과인의 대답도 들려주마.”

그리고는 보검을 빼들어 망루 쪽을 바라보며 길게 휘저었다. 그걸 본 계포가 북을 올려 명을 대신하자 성 밖 망루에서 성벽 위로 까맣게 활과 쇠뇌의 살이 쏟아졌다. 미리 화살을 재놓고 기다리던 초나라 궁수들이 성벽 위에 있는 한군(漢軍)의 향해 활과 쇠뇌를 쏘아붙인 것이었다.

성벽 위 높은 곳에 있어 화살 걱정을 별로 하지 않던 한군은 그 뜻밖의 사태에 크게 놀랐다. 넉넉하지 않은 방패 뒤로 숨어 꼼짝 없이 엎드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용케 망루위의 초군에게 화살을 날려보는 병사도 있었으나 망루 앞을 가린 두툼한 널빤지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쳐라. 모두 성벽 위로!”

이윽고 패왕이 그렇게 외치며 장졸들을 내몰았다. 기세가 오른 초나라 군사들이 함성과 함께 성벽에다 구름사다리를 걸치고 갈고리 달린 밧줄을 던져 올렸다. 그제야 다급해진 성벽 위의 한군이 화살 비를 무릅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나무와 바위를 굴리고 구름사다리를 밀어냈으나 그 기세는 이미 드러나게 꺾여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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